2024. November

kyung sung NEWS LETTER

쪽방촌 치과 진료로 만나는 타인 그리고 세상

[출처 : 서울대 사람들 vol.75 웹진]

 

쪽방촌 주민들은 하루하루를 견디는 시간을 산다. 끼니를 챙기고 월세를 내는 일 외에 모든 것들이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웃에 생긴 우리동네구강관리센터는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축복 같은 공간이다. 쪽방 주민들의 치과 주치의로 다정한 이웃을 자처하는 한동헌 교수가 이 작은 동네에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인 이유다.

한동헌 치의과학과 교수

 

 
구강건강 불평등 시대의 작은 희망

서울 종로구 돈의동 쪽방상담소 5층에는 ‘우리동네구강관리센터’가 있다. 전국 최초로 문을 연 이곳은 말 그대로 쪽방촌 주민들이 무료로 치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공간은 작지만 깔끔하고, 제대로 갖춰진 진료 설비들과 반갑게 방문객을 맞아주는 직원이 있어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2022년 12월 1일 처음 문을 연 이곳은 2021년 서울시가 실시한 실태조사에서 ‘쪽방 주민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의료서비스’로 치과 진료가 꼽히면서 예전부터 이곳에서 의료봉사를 해온 ‘행동하는의사회’와 서울시, 우리은행이 함께 문을 연 곳이다.


진료가 시작되기 전에 만난 한동헌 교수는 먼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손짓으로 네모나게 그려 보였다. 빌딩이 둘러싸고 있는 오목한 자리에 작은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쪽방촌. 한 사람이 겨우 누울 만한 벌집 같은 이곳이 바로 구강관리센터를 찾는 주민들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치과는 이곳 주민들에게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곳입니다. 지금 당장 방세를 내는 것, 밥을 먹는 것이 중요한 분들에게 이를 열심히 닦으세요, 치과에서 정기진료를 받으세요, 라는 건 현실성이 떨어지는 얘기니까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의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삶의 태도로 아예 굳어진다는 점이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씹지 못하는 문제가 가져오는 영양불균형, 치통, 잇몸질환이 불러오는 불편함. 이런 문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 이로 인해 삶의 질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말이다.

“상황을 바꾸려면 교육 수준, 경제 수준을 올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이러한 것들을 당장 바꿀 수 없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지금 바꿀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죠. 저는 교육과 연구, 봉사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93학번인 그는 대학 시절부터 나누면서 살 수 있는 사회, 승자 독식이 아닌,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의사들도 충분히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의 90년대 초 학번 의대생들이 모여 만든 ‘행동하는의사회’에 참여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쪽방촌 주민들과의 교감 그리고 치료
‘행동하는의사회’는 쪽방촌에 거주하는 만성질환자들을 위해 혈압, 혈당을 체크하고 약을 처방하는 등 활발한 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치과 진료는 불가능했다. 장비와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야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부산에서 활동하는 ‘행동하는의사회’ 회원들이 기업의 후원 없이 장애인치과를 열었다. 10년이 넘게 그곳을 운영하면서 서울에도 이런 곳을 만들면 좋겠다는 데 회원들의 의견이 모아졌고, 그 결과 쪽방촌 주민들이 편하게, 스스럼없이 찾아올 수 있는 공간으로 돈의동에 ‘우리동네구강관리센터’를 열 수 있었다.


“장애인치과의 경우 여러 번 오기 힘드니까 전신마취를 해서 한 번에 많은 치료를 하고 집에 돌려보내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만, 치과의사들은 그게 올바른 방향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치과의사라면 누구나 치료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스스로 치아를 관리하고 질병이 더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그러려면 치료 전과 후에 사람들과 교감하고 교류하는 게 꼭 필요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치과는 가급적이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하물며 치과나 구강관리를 염두에 두고 살지 않는 주민들에게 치과는 더욱 두렵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한동헌 교수가 격의 없이 주민들을 대하면서 신뢰를 쌓아온 것도 ‘예방치학’ 전문가로서 주민 스스로 치아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치과 치료는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치료를 마무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치료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입안 건강을 챙기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경계를 넓히면 비로소 보이는 타인들
한동헌 교수는 공공의료에 관심이 많다. 수많은 견해와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공공의료에 대해 그는 “어떤 사회적 여건에도 물러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주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자신의 건강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고 건강을 지키는 데 스스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앞으로의 건강과 의료의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주민이 진료 과정에서 일어나는 치료 결정에 대해 주체적이어야 해요. 내 건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물론 의료인과 서로 합의된 결정을 토대로 하여 진료와 건강 관리가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가야 할 거예요. 그런 의료의 변화라면 특정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우리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측면에서의 공공의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서울대 치대 교수라는 타이틀 안에서 ‘행동하는의사회’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도모해왔고, 쪽방촌에서 진료하며 구강건강의 불평등에 대해 소리를 내왔다. 타인과의 공존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당연히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같은 인간이다, 라는 범주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계속 넓어져왔어요. 유럽의 백인 남성만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을 지나 흑인 남성도 인간이니까 투표권을 주자, 여성도 인간이니까 투표권을 주자고 했지요. 장애인과 성소수자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생각하는 세상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안에 있는 자들이 나와 같은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보고 살아온 세상의 범위 바깥에 있는 건 절대 생각하지 못해요. 그럼에도 동정심과 공감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여태 살아남았지요. 저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범위를 넓혀주고 경계를 넓혀주는 게 공존을 위한 대안이라고 봐요. 봉사나 사회공헌활동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경험하고, 이후 대학 교육과정 안에서 이런 활동들이 더 넓고 깊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죠. 경계가 확장되면 개인의 세계도 넓어지지만 집단, 조직, 기관의 세계도 넓어집니다. 타인과의 공존이요? 우리가 가진 경계를 확장시켜야 합니다.”


강의실에서 빠져나와 쪽방촌을 경험하고 쪽방촌 주민을 치료해온 그의 세계 안에 얼마나 많은 타인들이 존재할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우리동네구강관리센터에 더 많은 주민들이 찾아와 스스로의 치아 건강을 꼭 찾길 바란다는 한동헌 교수. 그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공존의 과정은 평화롭게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고 희생 또한 있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교훈을 얻어 공존해왔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희생을 되도록 최소화하면서 공존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봉사나 사회공헌활동을 중·고등학교
때부터 경험하고, 이후 대학 교육과정 안에서
이런 활동들이 더 넓고 깊게 다뤄져야 하는
이유죠. 경계가 확장되면 개인의 세계도
넓어지지만 집단, 조직, 기관의
세계도 넓어집니다.



 

[출처 : 서울대 사람들 vol.75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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