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종착점 :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 컬럼
- 2021. 11. 22.
비극의 종착점
카자흐스탄 우슈토베
마르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삭막한 땅이 지평선까지 이어진다. 듬성듬성 서 있는 키 작은 나무들은 마치 죽음 앞에 고해 성사하듯 간절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놀랍게도 불과 몇 십 년 전까지 바다 속이었던 공간이다. 내해(內海)였던 곳, 철갑상어가 알을 낳고 잉어가 노닐던 평화로운 바다는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글|사진.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가아랄 해의 고려인
재앙의 시작은 1960년경 소련 정부가 아랄 해(Aral Sea)로 흘러드는 아무다리야 강, 시르다리야 강에 관개수로를 만들어 목화 재배를 늘리면서부터다. 결국 반세기 만에 아랄 해는 10분의 1로 줄어든다. 세계에서 4번째로 컸던 내해가 통째로 증발하자 혹독한 대가가 뒤따랐다. 여름은 더 뜨거워졌고, 겨울은 더 차가워졌다. 급격한 기후 변화는 생명의 땅에 죽음을 몰고 왔다. 카자흐스탄 아랄스크 한쪽에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는 한 박물관. 낯익은 동양인 여성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아랄 해가 제 모습이었을 때 통조림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다. 생선을 다듬는 솜씨가 남달라 국가훈장까지 받은 그녀의 정체를 알기 위해선 한인 강제 이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려야 한다.
소수민족의 감옥
1937년 9월 9일 550명을 태우고 연해주 라즈돌리노예 역에서 처음 중앙아시아로 출발한 열차는 그해 연말까지 17만 명이 넘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실어 나른다. ‘타향의 고향’ 연해주를 등진 한인들은 짐짝처럼 화물칸에 실려 종착지조차 모른 채 한 달 넘게 두려움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먹고, 싸고, 자고를 한 공간에서 할 수밖에 없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그 숫자가 무려 2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운이 나쁜 주검은 속절없이 달리는 기차에서 내던져졌고, 조금 운이 좋으면 기차가 멈출 때 황량한 벌판에 그대로 버려졌다. 스탈린은 한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독일인·타타르인·체첸인·칼므이크인 등 소련 내 소수민족 대부분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는데 1930~1940년대 중앙아시아는 사실상 소수민족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로 간 독립운동가
이유도 모른 채, 목적지도 모른 채, 화물칸에 실려 6,000km 떨어진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혹독한 추위였다. 살아야 했기에 토굴을 파고 겨울을 났다. 봄이 오자 토굴에서 나온 한인들은 아이들부터 가르쳐야 한다며 학교를 세우고 농토를 개간해 씨를 뿌린다. 그랬던 그들은 목숨을 구해준 토굴 터 앞에 묘지를 만들고 영면에 든다. 죽어서도 자신들이 일군 땅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싶었던 걸까. 고려인들의 비석은 하나같이 아스라이 지평선까지 뻗어 있는 드넓은 농토를 향해 있다.
하지만 강제 이주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누구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넘어갔고, 누구는 고향에서 더 멀리멀리 서쪽으로 향해야 했다. 개중에는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서쪽 끝에 있는 아랄 해 인근까지 이주했다. 아랄스크에서 마주한 사진 한 장에는 이렇듯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런 역사의 큰 파고를 피해 갈 수 없었던 사람 중엔 독립운동가도 여럿 있었다. 홍범도, 계봉우, 최봉설 등도 속절없이 강제 이주 기차에 올라야 했고, 민긍호·이동휘·최재형의 가족 등도 제2의 고향 연해주를 등질 수밖에 없었다. 이중 홍범도는 크질오르다로 이주하는데 거기서 극장 관리인으로 일하다 생을 마감한다.
독립운동가들의 애잔한 말년이 어디 홍범도뿐이겠는가, 강제 이주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그간 역사에서 지워진 사람들로 살아야 했다. 소련과 한국의 수교가 맺어진 건 1990년 들어서다. 그전까지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좌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분위기 탓에 제대로 조명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그들의 업적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건 30년밖에 안 된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중앙아시아를 방문하면서 계봉우·황운정 지사의 유해를 대통령 전용기로 봉환한 바 있다. 대한민국이 생기고 나서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대통령 전용기로 봉환한 첫 사례다. 기쁘면서 씁쓸한 장면이지 않나. 그간 우리가 하지 못했던 일이 무엇인지 또렷해지는 순간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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