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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난의 행군’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활동은 상하이 시기(1919~1932년), 이동 시기(1932~1940년), 충칭 시기(1940~1945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고난의 대장정’으로 불리는 이동 시기는 독립군에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나날이었다.

글|사진.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가


‘남목청 사건’과 김구의 피격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임시정부는 급히 항저우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전장에 자리 잡은 뒤 당시 중국 수도였던 난징 등을 무대로 비밀스럽게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1937년 7월 중·일 전쟁이 발발한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1937년 11월 충칭으로 수도를 옮기자 임시정부도 급히 배편을 마련해 후난성 성도 창사로 방향을 잡는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2월 초 창사에 도착하는데 2주 뒤 난징 대학살이 발생한다.

아비규환이 된 난징을 간발의 차로 빠져나온 임시정부 요인들은 창사에서 ‘남목청 사건’이라 불리는 비극적 총격 사건에 휘말린다. 1938년 5월 7일 남목청 6호 건물에서 한국국민당 김구·조완구, 조선혁명당 지청천·현익철·유동열, (재건)한국독립당 조소앙·홍진 등 3당 대표가 모여 통합회의를 진행할 때였다. 조선혁명당원 이운환이 회의 중인 3당 대표를 권총으로 저격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때 김구는 가슴에 총상을 입고 상아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다. 의사들은 김구의 상처가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봤다. 김구는 몇 시간 동안 방치된다. 그런데도 김구가 죽지 않자 의사들은 뒤늦게 혼신의 힘을 다해 그를 살려낸다. 당시 후난성 주석 등은 김구의 피격 소식에 모든 방법을 강구하라며 특별 지시를 내렸으며, 장제스도 여러 차례 전문을 보내 경과를 살폈다.

김구가 피격당한 창사 남목청 6호 건물처

 

광저우, 동산백원이 남아 있어

1938년 7월 임시정부는 다시 짐을 꾸려 광저우로 향한다. 후난성 장치중 주석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기차 한 칸을 배정받는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등 100여 명이 좁은 기차 안에서 푹푹 찌는 더위를 이겨내며 그렇게 4일을 갔다. 광저우에선 ‘동산백원’을 거처로 정한다. 사용 기간은 1938년 7월부터 9월까지 2달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 소실된 것으로 전해졌지만 지난 2017년 2월 정확한 위치가 확인됐다. 다행스럽게 건물이 남아 있었다.

임시정부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건 일본군이 광저우에 상륙한다는 정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허겁지겁 다시 짐을 꾸려 광저우 시에서 마련해준 류저우행 기차 편에 오른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넘긴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가다 일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기차는 멈춰 서기를 반복했고 승객들은 수풀 속이나 나무 밑으로 몸을 숨기기 바빴다. 도중에 철길이 끊겨 목선을 빌려 주강을 거슬러 오르기도 했고 설상가상 배가 몰래 떠나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류저우에 닿은 게 1938년 11월 말이다.

 

충칭, 대이동의 종착지

임시정부는 1939년 4월까지 6개월간 류저우에서 활동을 한다. 거처는 낙군사란 여관이었다. 그러던 중 일본군 전투기가 류저우까지 공격하는 상황에 이르자 임시정부는 1939년 4월 서둘러 충칭 남쪽 50km쯤에 위치한 작은 도시 치장으로 향한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바로 가지 못한 건, 인구 20만의 소도시였던 충칭이 중국의 임시수도가 되면서 10배 이상 인구가 폭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충칭은 심각한 주택난과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었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류저우에서 또다시 험난한 여정을 거쳐서 1939년 5월까지 순차적으로 치장에 도착한다. 그렇게 임시정부는 치장 생활 1년 4개월 만인 1940년 9월 충칭 교외 토교에 땅을 빌려 안정된 거주지를 마련한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난 지 8년, 거리로는 3만 리에 달하는 고난의 행군 종착지였다.

충칭에는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연화지)가 잘 보존돼 있고 김구의 장남 김인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묻힌 화상산에 위치한 한인 묘지 터 등이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이곳은 주변에 길이 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상황이다.

치장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동녕의 거처

 

[ 출처 : 사학연금 4월호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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