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서쪽에 남은 우리의 흔적
- 컬럼
- 2021. 9. 1.
러시아 서쪽에 남은 우리의 흔적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립운동가 이인섭의 막내딸 스베틀라냐 슬로보치코바를 만난 적 있다. 그녀는 약속 시간에 맞춰 날 집으로 초대했다. 집안은 구수한 밥 냄새로 가득했다. 식탁 위에는 지친 여행자의 눈이 번쩍할 만한 한국식 반찬들이 올라와 있었다. 뜻밖의 환대였다. 그녀는 요즘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책을 읽고 싶어서다. 책을 읽어 나가는 속도가 느리지만 한 줄 한 줄 몰랐던 아버지를 알아 가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했지만 늦게나마 한국에서 인정을 받게 돼 너무 기쁘다고 했다. 이렇듯 유라시아의 반대 러시아 서쪽에도 우리가 톺아 봐야 할 역사가 명징하다.
글|사진. 김동우 다큐멘터리 사진가
이범진의 쓸쓸한 죽음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과 싸운 포도대장 이경하의 서자 이범진(1852~1911). 그는 과거 급제 뒤 명성황후 눈에 들면서 조정 내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에 성공한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가 이범진이었다. 고종의 안전을 확보한 뒤 이범진은 미국 워싱턴 주재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돼 4년간 재직한다. 그리고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 3국 겸임 공사에 임명돼 파리에 부임하지만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 공사로 파견된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전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소환을 집요하게 요구한다. 이에 고종은 1904년 5월 18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사관 폐쇄와 공사 소환을 지시하고 9월 1일자로 이범진을 면직시킨다. 그러면서 고종은 “귀환 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러시아에 남아라”란 밀명도 함께 내린다.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과 함께 1906년 초 공사관이 폐쇄되고 나서도 러시아 정부를 대상으로 활동을 계속한다. 그러던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이상설과 이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 외국어에 능통한 이위종을 특사에 합류시킨다. 1908년에는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최재형·안중근 등이 몸담고 있던 의병단체 동의회 창설을 후방에서 지원한다. 이때 이범진이 동의회에 보낸 군자금은 1만 루블에 달했다. 이범진 공사는 공사관 폐쇄 이후 쵸르나야강 강변 작은집에서 외로운 여생을 보내다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1911년 1월 26일 정오 천장 전등에 목을 매 자결한다. 그는 러시아 궁내성, 고종 그리고 장남 이위종 앞으로 3통의 영문 전보를 유서로 남겼다.
이범진은 자결 며칠 전 장례회사를 찾아가 2,500루블을 지급했는데 이는 장의비용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해 운반비용이었다. 또 미주 샌프란시스코 국민회에 7,000루블, 블라디보스토크 거류민회에 5,000루블 등 총 1만 2,000루블을 독립자금으로 남겼다.
이범진 공사의 유해는 그의 바람과 달리 연해주로 가지 못하고 1911년 2월 3일 우스펜스키 묘지에 안장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 묘지(옛 우스펜스키 공동묘역) 8구역. 러시아인 묘비 사이로 낯익은 한국식 비석이 서 있다. 2002년 7월 세워진 이범진 공사 추모비다. 그의 묘는 1975년 북방 묘지 재정비 과정에서 무연고 묘지로 분류돼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그가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 추모비를 세운다.
러시아 영웅들과 함께 잠든 김규면
지난 2002년 러시아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임시정부 교통총장 직무대행으로 내정됐던 김규면(1880~1969)과 그의 부인 김나자(1887~1973)가 합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김규면은 1880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속성과를 나와 무관이 된다. 군인 정신이 투철했던 그는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자 훈춘으로 망명해 1914년 이동휘와 함께 ‘동림무관학교’를 설립했고 1920년에는 대한신민단을 이끌고 봉오동 전투에 합세해 힘을 더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차장 등을 역임한다. 이밖에도 모스크바 외곽 노보 프레지노 공동묘지에는 독립운동가 강상진(1897~1973)이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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