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 2025

kyung sung NEWS LETTER

11년 차 작가의 1년 차 초보운전 회고록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글. 김민선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SBS <신들린 연애>
채널A <하트시그널4>
KBS <자본주의 학교>

 

방송작가로 살아온 햇수가 두 자릿수를 달성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캥거루족의 삶이 꽤나 행복했던지라, 딱히 독립에 대한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살아온 동네가 너무나 익숙했고, 쉴 때만큼은 일터인 상암과 여의도 혹은 목동에서 물리적으로나마 멀어지고 싶었달까. 서울 동쪽에서 직장까지 편도 1시간 이상이 기본이었지만, 직업 특성상 러시아워를 비껴갈 수 있었기에 출퇴근길이 부담스럽진 않았다. 어느 날 무심코 열어본 가계부 앱에 찍힌 교통비 60만 원을 발견하기 전까진!

회사와 집의 거리는 23km. 늦은 퇴근 덕분에 나는 늘 할증 시간에 택시 앱을 켜곤 했다. 새벽마다 미터기 액정 안 야생마는 어찌나 빨리 달리던지. ‘열심히 일했으니 이 정도는 쓸 수 있지’ 위안했지만 60만 원에 가까운 숫자를 보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4개월 연속 과소비 경보가 울린 어느 날, 앱이 일침을 날렸다. “차라리 차를 사는 게 어떨까요?”

자차 구매를 결심한 뒤, 각종 신차 영상이 나의 알고리즘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분명 경차로 입문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2배 값인 중형 세단을 보고 있었다. 모닝 보러 갔다가 벤츠 산다더니, 보태보태병이 이렇게 무섭구나. 불행 중 다행으로, 내 통장이 감당할 수 있는 가격대는 한정적이었고, 몇 달의 고민 끝에 나는 풀옵션의 아반떼 신차를 전액 일시불로 결제했다. 인생에서 가장 비싼 쇼핑이었다.

첫 차를 뽑은 지 6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무렵이었다. 출퇴근길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고 한창 운전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가끔은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며 드라이브 느낌을 내보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 정도의 용기는 없었던, 왕초보와 초보의 경계에 있던 시기. 어느 날 외할머니가 볼일을 보러 동네에 오셨고, 마침 집에 있던 나와 엄마는 함께 식사를 마친 후, 할머니를 댁으로 모셔다드리기로 했다. 반년의 주행 경력으로 근자감이 꽤나 차올라있던 내가 운전기사를 자처했다. 할머니는 손녀가 못미더우셨는지 차에 앉자마자 조수석 손잡이를 꽉 잡으셨고, 그렇게 세 모녀를 태운 아반떼는 강변북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새파란 하늘, 한여름에 에어컨 빵빵한 실내 공기까지. 출퇴근길도 벌벌 떨며 다니던 내가, 엄마와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라니! 진정한 어른이 된 것만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목적지인 일산까지 10여 분 정도 남았을 때였을까, 내비게이션에서 유난히 청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5km 앞에서 유턴입니다.”

엄마는 뒷자리에서 잠에 들었고, 귀가 어두우신 할머니는 안내음을 듣지 못하신 듯했다. ‘55km?! 이게 무슨 일이야?’ 최대로 켜둔 통풍 시트가 무색하게 등에선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일산으로 빠지는 길 바로 옆은 인천공항으로 직행하는 고속도로였고, 순간의 분위기에 취했던 나는 초보의 신분을 망각한 채 내비게이션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새 도착 예상 시간은 ‘59분 뒤’로 바뀌어 있었다. 맙소사. 나의 최애 짤이었던 시트콤 <세친구>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왕초보였던 주인공이 직진밖에 못 하는 이슈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버린 전설의 에피소드. 그게 내 일이 될 줄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톨게이트가 나왔다. 울고 싶었다. “삼천이백 원이 결제되었습니다.” 속도 모른 채 경쾌한 알람이 울렸다. 당황한 나와 달리 엄마와 할머니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바다나 보고 가자”며 오션뷰 카페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일에 치여 바다 구경 한번 하지 못했던 한 해였다. 이것도 추억인데 한번 가보지 뭐. 마음을 바꿔 먹으니 묘한 설렘과 흥분이 솟았다. 2024년의 첫 바다 여행은 그렇게 예고 없이 성사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짭짤한 바람을 맞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바다도 와보고 좋데이.” 할머니 말에 미소가 지어졌다.

평생 보행자의 신분으로 살다가 서른이 넘어 운전대를 잡은 이후, 새롭게 느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적응하기 무섭게 매번 변하는 도로 상황, 방심했을 때쯤 찾아오는 실수, 그리고 어쩌면 그 실수 덕분에 경험할 수 있었던 예상치 못한 즐거움까지. 생각해 보면 운전대를 잡았던 지난 1년의 시간은 나의 작가 생활과 무척 닮아있다.

방송국 밥 10년 먹었으면 대본 정도는 눈 감고도 쓸 것 같았는데, 새 프로그램에 적응하는 것은 여전히 초행길 운전 마냥 힘들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지난 10년의 시간이 부정적인 감정들로만 채워졌던 건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함께 밤을 새웠던 동료들은 나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로 남았고, 일한 지 두 달 만에 종영을 통보받은 프로그램을 계기로 너무나 존경하는 선배님과의 인연이 시작되기도 했다.

운전을 하며 느꼈던 소소한 즐거움과 깨달음의 순간들이 나의 작가 생활에도 곳곳에 묻어있음이 보인다. 오늘도 나는 운전대를 잡고 방송국으로 향한다. 앞으로 계속될 나의 작가 생활에도 예상치 못한 바다 여행이 또 한 번 찾아오길 바라며!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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