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5

kyung sung NEWS LETTER

다시 만난 사람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MBC경남 <엄마의 말뚝>

조현우 MBC경남 PD

<엄마의 말뚝> 연출
2024년 12월 민언련 이달의 좋은 보도상
제298회 이달의 PD상 TV 시사·다큐 부문

 


 

쉽게 써지지 않았던 제작 후기

며칠을 책상 앞에 앉아 있었지만 마음 편히 제작기를 써 내려갈 수 없었던 것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곳에는 대통령 탄핵 인용이 될 경우 헌법재판소를 두들겨 부수어야 한다며 12.3 비상계엄 혐의자들에 대한 긴급구제 안건을 주도적으로 의결한 사람이 있다. 김용원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추천으로 인권위 상임위원이 된 그는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제도화한 ‘군인권보호관’을 겸직하고 있다. 그에겐 본인이 내린 결정에 항의 방문한 유가족들을 고소·고발한 전력도 있다. 그런 이를 보며 느끼는 참담함이 유족들의 마음에 비하겠냐마는, 악행에 가까운 그의 기행 때문에 제작 후일담을 풀어놓는 것이 큰 과제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말뚝>의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모든 이가 느낀 마음은 즐거움 내지는 뿌듯함일 것인데, 그 마음을 지금 이야기해도 되는지 회의가 들어서다. 기울어 가던 마음에 균형추가 되어준 것은 방송에도 나오는 군인권센터 활동가의 인터뷰였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대상은 군인권보호관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제도를 망가트리는 사람’이라던 그의 말 덕분에 지난 1년 동안 다큐를 만들며 느꼈던 마음을 더욱 적극적으로, 당당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박미숙 님이 박정훈 대령의 긴급 구제안을 기각시킨 김용원 군인권보호관에게 피켓을 들고 항의하고 있다. (2023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 ©MBC경남

 

군 인권의 분기점, ‘윤 일병 사건’

<엄마의 말뚝>을 제작했던 2024년을 떠올리기에 앞서 2014년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4년 여름, 한국은 두 달 가까이 군대 이야기로 들끓고 있었다. 선임병들의 지속적인 폭행 끝에 죽음에 이른 어느 병사의 사연이 그의 사망 석 달 뒤에야 시민단체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뒤이어 그 죽음을 냉동만두를 먹다 질식사한 것처럼 둔갑시키려 한 군 수사기관의 은폐 정황도 밝혀지며 군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벌집을 몇 번이고 쑤신 것처럼 극에 달했다. ‘세월호’라는 전대미문의 참사에도 무감하게 대응했던 대통령조차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긴급히 열고, 국방부 장관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일 만큼 사안은 크고 중대했다. 이른바 ‘윤 일병 사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소개해야 할 때면 ‘윤 일병부터 채 상병까지, 군 사망사고 유족들의 10년을 정리한 다큐멘터리’라고 운을 뗀다. 이 방대한 표현을 스스로 내뱉는 것이 민망스럽지만 꿋꿋이 이어가는 이유가 있다. 무책임한 위정자들이 남과 여, 징병과 모병 등의 분열적인 키워드로 공회전 같은 논의를 지속하는 동안 유가족들이 바꾼 법과 제도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배경엔 나 같은 부모가 다시는 나와선 안 된다는 일념으로 분투에 앞장섰던 유족들과, 개인사로 치부되기 일쑤였던 군 사망사고를 의제화하고 연대한 군 인권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었다.

 

군 사망사고 유족들과의 2년

안미자, 공복순 님이 오랜만에 만나 지난 10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24년 6월, 서울시 성북구) ©MBC경남

나는 그 모습을 초근거리에서 본 경험이 있다. 2014년 9월부터 약 2년간 윤 일병 사건의 재판을 모니터링한 것이 계기가 돼 2016년에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라는 군 사망사고 유가족 단체를 찾았다. 사무실을 청소하는 정도의 쓸모라도 실천하고 싶어 자처한 걸음이었는데,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나와 우리와 같이 있어 주기만 해도 좋다는 말씀을 듣곤 주간 모임에 ‘자원활동가’라는 이름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안미자(故 윤승주 일병 어머니)·공복순(故 노우빈 훈련병 어머니)·박미숙(故 홍정기 일병 어머니)·황오익(故 황인하 하사 아버지) 선생님 등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주신 유족분들을 그때 처음 뵈었다.

내가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해봐야 모임의 머릿수를 채우거나 주요 행사를 촬영·기록하는 정도에 그칠 정도로 미미했지만, 부모님 모두가 아들 또래의 대학생을 진심으로 아껴주신 덕에 2년 동안 ‘함께’에 있을 수 있었다. 누군가 살며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묻는다면 그 어른들과 함께 밥 먹고 함께 걸었던 시간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저 그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다. 세간의 이목이 두려워 웃거나 울지 못했던 분들이 그곳에서만큼은 폭소하고 통곡하는 것이 다행스러웠고,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쏟아주시는 신뢰가 분에 넘치도록 감사했다. PD가 될지,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다큐로 제작하게 될지 상상도 못 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취직을 위해 그곳을 떠나오고 나서야 내가 그분들로부터 얼마나 큰 애정과 소속감을 받아왔는지 알게 됐다.

 

<어른 김장하>의 성공이 남긴 유산

유가족분들께 다시 연락을 드린 건 작년 4월이었다. 5년 만이었다. 그 사이 <엄마의 말뚝>은 방송문화진흥회의 콘텐츠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돼 제작비 걱정을 어느 정도 덜어낸 상태였다.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인정받았다는 안도감도 있었지만, 지역방송사 사정상 외부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않고선 다큐멘터리 제작을 현실화하기 쉽지 않기에 예산 문제를 해소했다는 점이 가장 다행스러웠다. 유족분들은 윤 일병 사건 10주기를 맞아 한국 군대에 맞서 당신들이 변화시켜 온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여전한 과제로 남아있는지 정리해 보자는 기획의 취지에 공감하며 장기 팔로우에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군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 김형남 사무국장이 자문으로 나서 프로젝트를 함께 고민해 주셨던 것도 든든한 지점이었다.

안미자, 박미숙 님이 군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 김형남 사무국장과 대화하고 있다. (2024년 8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MBC경남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회사의 지지나 승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리적인 지역성을 구현하는 것만이 지역방송사의 역할은 아니라는 기조를 오랫동안 유지해 온 선배들과, 좋은 콘텐츠 제작을 최우선으로 독려하는 이우환 대표이사의 원칙 덕분에 군 사망사고 유족이 전면에 등장하는 오랜 기획을 중앙사가 아닌 MBC경남에서 실현할 수 있었다. 2년 전, 선배인 김현지 PD가 연출한 <어른 김장하>의 전국적인 흥행을 말미암아 회사 내부에 형성된 자신감과 성취감에 기댄 바도 크다. 대형 콘텐츠가 주를 이루는 시대에 지역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인 관심과 사랑을 받았던 그 경험이 유산으로 남아 제작 과정 내내 큰 힘이 되었다. 기획 단계부터 여러 버전의 <어른 김장하> 기획·구성안을 공유받는다거나, 당시의 제작 스케줄을 참고해 워크플로를 구성하는 식이었다. 마침 <엄마의 말뚝>을 함께한 차선영 작가가 <어른 김장하>에도 참여했던 터라 그때그때 꼭 수행해야 하는 업무들을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었던 것도 주효했다.

 

2천 장이 넘는 프리뷰 텍스트, 그래도 편집이 가장 쉬웠던 이유

촬영을 개시한 5월 말부터 한 달 동안은 주요 인물의 인터뷰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예정된 분량상 모든 이야기를 다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주요 인물들의 경우 서너 시간 인터뷰할 정도로 그간의 이야기를 모두 확보하는 데 신경 썼다. 10년의 이야기를 요약해야 하는 다큐 특성상 등장인물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인물들의 연결성을 높이기 위해선 동일한 질문이라도 여러 사람에게 던져 다양한 답을 구해놓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유족분들을 처음 뵙고 각자의 사연도 처음 듣는 촬영팀은 장시간의 인터뷰를 낯설어했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유족분들과 나는 카메라 앞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다. 그 인터뷰들을 음성파일로 추출해 이동하는 차 안, 산책 등 여유가 될 때마다 반복적으로 들으면서 프로젝트에 대한 당위나 책임감을 스스로에 끊임없이 주문하기도 했다.

인터뷰와 더불어 가장 중요했던 작업은 자료 영상을 발굴해 내는 것이었다. 10년을 복기하는 데 시각 자료가 양적으로 빈약하다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고민을 극복할 수 있었던 데엔 본사의 아카이빙 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NPS팀 덕이 컸다. 군 인권과 관련한 중요 구간마다 본사의 취재팀이 상세히 기록한 촬영물들을 함께 찾아주고, 카테고리화했다. 그렇게 모은 파일이 천여 개를 훌쩍 뛰어넘었다. 출연자 다수가 항상 그 현장에 있었던 까닭에 파일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작업은 안개를 한 올 한 올 걷어내는 행위와도 같았고, 모든 영상을 시청한 직후엔 프로젝트를 완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까지 얻었다. 때문에 약 50회차의 본 촬영분을 포함한 프리뷰 텍스트의 양이 2천 장을 넘는 것이었음에도 편집 과정은 오히려 수월하고 평탄했다. 간혹 자료화면 안에 담겨 있는 10년 전의 나를 발견해 내는 재미도 있었다. 울부짖는 유족의 뒤편에서 피켓을 들고 어쩔 줄 모르는 스물네 살의 나를, 서른네 살의 내가 화면으로 바라보는데 묘한 감정이 일었다.

안미자, 이주완(故 이예람 중사 아버지) 님이 군인권보호관 제도 입안을 위해 국회 운영위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1년 12월, 국회 운영위원회) ©MBC경남

 

<엄마의 말뚝> 이후의 시간

<엄마의 말뚝>은 2024년 12월 26일과 27일 양일에 걸쳐 MBC경남 TV로 세상에 나갔다. 전편은 유튜브에도 업로드되어 경상남도 권역 바깥의 시청자들과도 만날 수 있었다. 방송분에는 담지 못했지만 사실 올해 1월 9일에 있었던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의 1심 선고 공판까지가 예정된 촬영이었다. 그날 아침 촬영팀과 함께 용산 중앙군사법원으로 향했다. 30여 분의 판결문 낭독 끝에 나온, ‘피고인은 무죄’라는 주심 판사의 극적인 선고보다 더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안미자 님이 박정훈 대령의 항명죄, 상관명예훼손죄 혐의 공판 직후 이뤄진 기자회견을 보고 있다. (2024년 5월, 용산 중앙군사법원 앞) ©MBC경남

 

판사는 박정훈 대령의 항명죄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이유를 2022년 7월 1일 개정된 군사법원법에서 찾았다. 박 대령의 즉각적인 수사 기록 이첩은 피해자의 인권 보장과 사법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법의 원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 군사법원법 개정안은 윤승주 일병의 유가족을 포함한 군 사망사고 유가족들이 10년 가까이 외쳐오다가 공군 이예람 중사의 사망사건을 기점으로 제도화됐다. 이주완(故 이예람 중사 아버지) 선생님도 그날 방청석에 계셨다. 재판 직후 박 대령이 그간 겪은 고초들과 계엄 정국에 무죄 판결이 시사하는 바를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승리감을 온전히 만끽하기 어려웠던 건, 그렇다고 해서 유명을 달리한 유가족들의 자녀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강처럼 흐르는 그 엄정한 사실 때문에 유족과 유족 아닌 사람들이 헤어지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다큐멘터리는 끝났지만 사무실 청소 정도의 쓸모를 고민했던 그때 그 마음으로, 다시 부지런히 내 쓸모를 찾고 싶다. <엄마의 말뚝>으로 그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어 진심으로 행복했다.

박미숙(故 홍정기 일병 어머니) 님이 아들과의 추억이 많은 서울 어린이대공원을 걷고 있다. (2024년 10월, 서울 어린이대공원) ©MBC경남

 

* 프로그램 관련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이미지입니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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