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오래 빛나는 게라디오 작가다
- 사람
- 2023. 7. 13.
글. 이재국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SBS <박철의 두시탈출>
SBS <김창열의 올드스쿨>
MBC <컬투의 베란다쇼>
tvN <SNL 코리아> 시즌2
2016 SBS 연예대상 방송작가상
오랜만이었다. 그래도 1년에 한두 번씩 꼬박꼬박 모임에 나가 선후배님들께 인사도 드리고 함께 식사하며 근황도 듣고, 어느새 2차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그 옛날 원고지에 만년필로 대본 쓰던 시절” 선배님들 얘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라디오 연구회’ 모임에서 선후배님들을 다시 만났다. 그동안 마스크를 쓰고 다니느라 사람들 표정 읽기가 어려웠는데 모처럼 환한 얼굴, 밝은 미소의 선배님들을 뵈니까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역시 사람은 만나야 하는 존재고, 서로 얼굴을 보고 얘기해야 더 정이 느껴진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라디오 연구회’ 모임에 가면 그야말로 레전드 선배님들이 많이 계셔서 옛날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게 꿀잼이다. 옛날에는 작가마다 자기 이름이 적힌 원고지가 있었고, 새로 원고지가 나오는 날이면 늘 ‘원고지 턱’을 내는 날이 있었다고 한다. 새로 원고지가 나온다는 건 그만큼 많이 썼다는 얘기고, 많이 썼다는 건 그만큼 원고료도 많이 받았다는 얘기니까,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고 동료들에게 술 한 잔 대접하는 게 예의였던 것 같다. 지금은 라디오라는 매체의 영향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예전에 가요 차트는 라디오에 의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그램 오프닝 멘트가 끝나면 나오는 첫 곡의 중요성, 그리고 각각의 사연에 어울리는 선곡들, 클로징 멘트 다음에 마지막 곡으로 어떤 곡을 선곡할지 작가와 PD 그리고 DJ가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에 한 곡 한 곡에 대한 파급력이 엄청났다.
라디오는 생방송이다 보니까 방송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교통체증으로 DJ가 지각을 하는 경우도 많고, 당일 출연자가 갑자기 연락이 안 돼서 펑크를 내거나, 노래 제목을 잘못 소개하는 바람에 DJ가 사과 방송을 한 적도 있고, 심지어는 DJ가 원고를 읽다가 모르고 원고 두 장을 한 번에 넘기는 바람에 7분짜리 코너가 2분 만에 끝난 적도 있고···. 어떤 선배님 말씀처럼 생방송 사고 에피소드만 모아도 책 10권은 족히 넘을 정도로 많을 것 같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라디오 작가 중에는 입담이 좋은 선배님들이 정말 많다. 매일 원고를 쓰다 보니 자료조사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축적된 깨알 지식들이 넘쳐나고, 지루하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써 내려간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콩트 원고들만 봐도 안 웃길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참고로 나도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아빠캠프’라는 곳에 간 적이 있는데, 유치원 선생님이 내주신 난센스 퀴즈 10개 중에 9개를 내가 맞히는 바람에 선생님이 “연우 아빠는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번 모임에서도 선배님들이 입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디오 연구회’ 김성 회장님은 오랜만에 인사말을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뷔페에 있던 오렌지를 들어 보이시며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게 얼마나 오랜지··· 오렌지만 봐도 반갑네요. 암튼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갑고요. 모두 건강하시고 오래 뵀으면 좋겠습니다.”라며 인사말을 끝나자 모두 즐겁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다.
나는 2001년 SBS <박철의 두시탈출>로 지상파 라디오 작가에 데뷔했다. 2016년에는 <김창열의 올드스쿨> 덕분에 SBS 연예대상 방송작가상도 받았다. 그동안 TV와 라디오를 오가며 예능 프로그램도 많이 하고 교양 프로그램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작가로서의 고향을 묻는다면 라디오가 나의 고향이다. 학창 시절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를 들으며 50원짜리 하얀 엽서에 사연과 신청곡을 적어 보내고 졸린 눈을 비비며 라디오에서 내 이름이 나오길 기다렸다. 혹시라도 내 사연이 소개된 날이면 괜히 잠을 설치고, 다음 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하던 그 시절의 라디오 감성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있다. 2016년에 방송작가상을 받고 나는 수상소감에서 이런 말을 했다. “라디오를 하다 보면 오늘 이별한 사람도 있고, 오늘 첫 소개팅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있고, 오늘 퇴원한 사람도 있고, 오늘 회사에 첫 출근을 하는 사람도 참 많고, 35년 동안 다닌 회사를 오늘 그만둔 사람도 있는 걸 보면서 매일매일이 이 세상이라는 걸 라디오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 이 시간에도 라디오는 생방송 중이고, 우리 인생은 또 다른 사연들로 채워지고 있고, 우리는 그 사연을 듣고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오랜만에 라디오 작가 선후배님들을 뵙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드라마 작가처럼 유명하지 않고, 예능 작가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더 오래오래 빛나는 게 우리 라디오 작가다.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이어트? 삼겹살·김치찌개 먹어도 됩니다! (0) | 2023.07.26 |
---|---|
길 잃은 강아지, 이제 AI로 찾습니다 (0) | 2023.07.20 |
나무의 숨결과 호흡하며 안부를 묻다 이야기를 듣다 (0) | 2023.07.05 |
책방이라는 행복한 사치에 빠져버렸다. <오래된서점> 안현주 대표 (0) | 2023.06.30 |
신임 리더에게 필요한 리더십 일급비급서 (0) | 2023.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