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이 규율을 이기다
- 컬럼
- 2021. 1. 25.
충성이 규율을 이기다
Writer_ 이미혜 예술사 저술가
로마인들은 훈련되고, 규율을 갖춘 군대를 이용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가 가장 강성했던 2세기경, 제국의 영토는 브리튼 북부 황무지에서 흑해 연안, 북부 아프리카에 이르렀다. 3백 년 뒤 로마 제국은 군대라기보다 무질서한 무리에 가깝던 게르만족 전사들에 의해 붕괴됐다.
로마는 그리스보다 더 체계적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운용했다. 군대를 3,000~6,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레기온으로 편성하고, 이를 단위별로 엄격하게 군사훈련을 했으며 막사에서 통제된 생활을 했다. 전문화된 군대는 민간 사회와 점점 멀어졌다. 초기의 로마 군대는 그리스 군대와 마찬가지로 생업에 종사하다 일정 기간만 복무하는 시민군이었으나 공화국 후반기부터 직업 군대로 발전했다. 시민들의 군역 의무가 폐지된 것은 아니지만 제국의 군대는 직업 군인, 지원병, 용병이 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 중에는 게르만족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전투력을 인정받아 꽤 높은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게르만족은 원래 동유럽, 북유럽에 거주하는 민족 전부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이들은 4세기부터 남하해 이탈리아를 위협한 북방 민족이다. 로마 제국은 회유책을 써서 이들을 통제하고 용병으로 이용했으나 5세기가 되자 몽고 계통의 유목민인 훈족이 서쪽으로 쳐들어오고, 이어서 게르만족이 공포에 사로잡혀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5세기 중엽 로마는 간신히 훈족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으나 뒤이어 게르만족이 들이닥치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게르만족 장군 리키메르는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로마 제국을 지배했다. 476년 리키메르의 뒤를 이은 오도아케르는 황제를 폐위하고 더는 황제를 지명하지 않았다. 역사서는 476년을 서로마 제국이 망한 해로 기록하고 있다.
1세기 말 로마의 학자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붉은 머리칼과 사나운 푸른 눈, 큰 몸집을 지닌 호전적인 종족이라고 묘사했다. 게르만족 군대는 규율보다 족장에 대한 충성심으로 뭉쳐 있었다. 전사들은 무기, 식량, 의복을 보급받고, 전리품을 분배받는 대가로 족장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들은 “우두머리가 전사한 뒤 살아서 싸움터를 떠나는 것은 일생일대의 불명예이자 수치”라고 생각했다. ‘충성’은 게르만족이 세운 중세 봉건사회를 결속시키는 기본 이념이 되었다.
게르만 신화의 소르 신은 이들의 호전성을 반영한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오딘 신의 아들인 소르는 게르만 전사처럼 사나운 눈,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을 지닌 거인이다. 그는 산도 때려 부수는 망치, 근육의 힘을 두 배로 해주는 허리띠,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해주는 쇠 장갑을 지니고 있다.
게르만족은 용맹한 전사를 우대했다. 이들은 위대한 전사가 죽으면 발할라 성에 간다고 믿었다. 발할라는 신들의 본거지이며 전사한 용사들의 안식처다. 이 성에는 오딘이 양 어깨에 갈가마귀를 얹은 채로 앉아 있다. 오딘의 딸들인 발키리는 싸움터를 헤매며 죽은 용사들 가운데 공적이 뛰어난 사람을 엄선해 발할라로 데려온다. 이곳에 모인 영웅들은 낮에는 서로 찢고 찢기는 싸움을 벌이다가 어두워지면 싸움을 중단하고 밤새도록 연회를 즐겼다.
독일 민족은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게르만 신화의 발할라 신전을 생각해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가 독일어권 전역을 휩쓸고 짓밟았다. 독일의 왕들은 저항했지만 허사였다. 나폴레옹은 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신성로마제국을 와해시켰으며, 프로이센을 굴복시키고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베를린으로 개선 행진을 했다. 이런 굴욕을 겪으면서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민족주의가 강하게 일어났다. 1825년 바이에른 왕국의 왕위에 오른 루트비히 1세는 발할라 신전을 세워 독일 정신을 빛내야겠다고 결심했다.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소집되던 도시인 레겐스부르크에 파르테논 신전을 본뜬 거창한 건축물을 세웠다. 발키리 여신상이 천장을 떠받치고 붉은색과 청색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홀에는 정치가, 장군, 학자, 예술가 등 위대한 독일인 130여 명의 흉상이 전시되어 있다. 도나우강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신전이 복잡한 감정을 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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