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2025

kyung sung NEWS LETTER

길은 기억한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SBS <나의 완벽한 비서> 지은 작가

글. 조미진 편집위원  사진. 김선미 편집자

 


 

“길은 모든 걸 기억해. 꿍, 하고 넘어졌을 때를. 꿋꿋하게 일어섰을 때를.”
<나의 완벽한 비서> 2화에서 지윤과 별이가 함께 읽는 동화다.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따뜻한 어른들의 동화로도 읽혔던 드라마. 20여 년간 오직 드라마 작가가 되어가는 그 길 위에서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지은 작가를 만났다.

유니콘 남주인공 이준혁 열풍을 일으키며 ‘1가구 1은호 보급 시급’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드라마! 강지윤(한지민 분)과 유은호(이준혁 분)의 완벽한 케미스트리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나의 완벽한 비서>가 최고 시청률 12%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종영했다. 이 드라마는 사십 대 중반, 열한 살 아들을 둔 엄마가 된 지은 작가의 이름을 처음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잘 믿기지가 않아요. 칭찬 들으면 너무 좋다가, 또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시청률이 잘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제가 복이 많은 것 같아요.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해 주신 건, 시기적으로도 좋았던 것 같고요. 멜로적인 부분에서는 감독님과 배우들한테 많은 덕을 봤죠. 일단 감독님이 캐스팅을 너무 잘 해주셨고요. 현장에서 배우분들이 아이디어도 많으셨어요. 매회 특별출연으로 나온 배우분들까지 연기를 너무 잘해주셔서 감사하죠.

 

거듭 복이 많았다고 말하는 지은 작가. 드라마 작가라는 길 위에서 무명작가로 자그마치 20여 년을 버티고 또 버텼다. 오직 쓰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대학생 때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어서 무작정 작가협회 교육원에 다녔어요. 그때 기초반 선생님께서 저를 주말드라마 보조 작가로 뽑아주신 거예요. ‘나 천재인가 봐. 20대에 데뷔하나?’ 한없이 부풀어 올랐을 때가 있었죠. 근데 데뷔는 무슨···(웃음). 스토리 회사에 들어가서 쓸 수 있는 모든 스토리를 다 쓴 것 같아요. 출판 만화에서 TV 애니메이션, 기업 스토리까지요. 생계를 위해서 대학에서 강의도 하고요. 시나리오, 드라마 할 것 없이 계속 글 쓰면서 버틴 것 같아요. 너무 안되니까 사실 자학도 많이 했어요. 근데 한 번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저한텐 드라마가 너무 열망이었던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편성이 너무 안 될 때는 ‘이걸 왜 이렇게 못 놓을까?’ 고민을 많이 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때 내렸던 결론이, 여전히 제일 잘하고 싶은 일이 드라마 작가인 거예요. 그래서 그냥 버틸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나의 완벽한 비서>(이하 ‘나완비’)는 원작이 없는 작품이다. 고통스러웠던 오랜 습작 기간. 하지만 그 길 위에 찍힌 발자국들이 지금의 ‘나완비’를 탄생하게 한 밑거름이 됐다.

이 작품이 굉장히 오래전에 공모전에 냈다가 최종심까지 오른 작품이었어요. 당시 대본을 좋게 보셨던 CP님이 나중에 제작사를 연결해 주셨는데 엎어졌죠. 이 작품은 그냥 묻어두고 다른 작품을 진행 중이었을 때, 지금 같이 제작한 오 대표님한테 ‘대본이 마음에 든다’고 연락이 왔어요. 저는 ‘대본이 책상에 있느니 마음대로 그냥 가져가세요’라고 그랬거든요. 대표님이 몇 년 뒤에 공동 제작사를 찾았다고 하면서 오신 거예요. 근데 그 공동 제작사하고도 제작이 무산되고, 결국 대표님이랑 저만 남아서 편성되기까지 3년 걸린 것 같아요.

 

공모전 최종심에 올라 기사회생하기까지의 세월로 따지면 7~8년. 최종 편성 확정만 따지면 3년이 흘렀다. 그동안 캐스팅에서 거절도 무수히 많이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은 작가가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보살핌’에 대한 메시지였다.

지금은 되게 좋다고 평가되는 부분이, 그때는 다 약점이었어요. 죽고 살리는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의사나 변호사의 세계같이 막 그런 갈등이 없는 거예요. 너무 따뜻하다, 남자 주인공이 멋있지 않아 등등. 많은 비판이 쏟아졌었어요. 근데 저는 당시 작품 배경이었던 ‘피플즈’라는 회사를 포기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처음 기획부터 한 번도 변하지 않은 게 싱글 대디와 헤드헌터의 이야기였거든요. 사람과 사람의 보살핌에 대한 메시지 때문에 시작한 거니까요.
싱글 대디를 최대한 포장하는 수정을 계속했었어요. 그러다가 캐스팅이 계속 안 되니까 ‘이 드라마 접어야 하나 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자!’ 마음먹었죠. 초반에 은호가 육아휴직한 거 다 밝히고, 쓰고 싶은 대로 한번 해보자 하고 쓴 버전으로 SBS 편성이 났어요. 다행히 편성이 난 상태에서는 생각보다 빠르게 캐스팅이 됐죠.

 

“그거 아세요? 다른 가게들은 다 가게라고 하는데 밥집만 집이라고 하는 거. 그러니까 밥은 집이랑 제일 잘 어울린다는 거죠.” 그 남자 은호는, 따뜻한 밥을 그녀에게 먹이고 싶어 한다.
“내가 유은호 씨 좋아해요.” 그 여자 지윤은, 그 남자에게 돌직구 고백을 할 만큼 당돌하다.
한지민 X 이준혁 배우가 열연한 역클리셰 로맨스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새로운 한 장을 장식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지윤이는 제가 되고 싶은 사람, 은호는 갖고 싶은 사람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지윤이 같은 여성을 좋아해요. 일에 갇혀 사는 부분이 있지만 프로페셔널한 부분은 되게 멋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도 갑질하는 상사가 아니라, 사랑스럽게 표현해야 했어요. 저희 드라마가 선을 지키는 게 힘들었거든요. 싱글 대디 비서니까 은호도 너무 수동적이면 답답하고, 반대로 선을 넘으면 되게 또 매력이 없어지고 그래서 그 선을 타는 게 숙제였던 것 같아요. 다행히 이준혁 배우가 연기한 은호에 열광해 준 걸 보면 시대의 변화가 아닐까. 기획 과정에서는 ‘이런 남자 멋있냐?’는 질문을 굉장히 많이 들었거든요. 저는 충분히 이런 남자가 좋은데. 나이가 들수록 옆에서 챙겨주는 다정한 사람이 필요하잖아요. 저희 아이는 자기가 ‘은호’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캠핑을 갔었는데 “추우니까 아빠랑 캔 커피 좀 사 와” 했거든요. 그랬더니 옷 속에 캔 커피를 품고 막 달려오는 거예요. 그러더니 “대표님, 온도에 딱 맞는 커피 가져왔습니다.” 이러더라고요. 자기가 유은호고, 엄마를 챙겨준다면서요.

‘나완비’에는 좋은 사람들이 참 많이 등장한다. 유니콘 같은 남자친구에서,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 생명을 지켜낸 의인 아버지까지. 그래서일까. ‘어른들을 위한 따뜻한 동화’라는 호평이 있는가 하면, 일부에서는 비현실적인 스토리라는 비판도 있다.

은호를 왜 지윤이 아빠가 구하게 했는가, 낡고 작위적인 설정일 수도 있는데요. 저는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선의의 순환’이라고 해야 할까요?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선의가, 다시 그 선의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타인에게 베푸는 식으로 이어지는 거요. 이렇게 돌고 돌아서 저는 세상이 한 발이라도 나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지윤이 아빠가 목숨을 걸고 선의로 구해준 아이가 이렇게 좋은 사람으로 자랐고, 그 사람이 또다시 아빠를 잃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했던 지윤이를 변화시켰어요. 분명 어딘가에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망하지 않고 굴러간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은호가 너무 완벽하고, 항상 참고 절제하며 살아가잖아요. 근데 “고마워요, 은호 씨. 이렇게 좋은 사람으로 살아줘서”라고 말하는 지윤이의 말을 통해서 은호의 인생도 구원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은호의 완벽함, 그 반대편에는 죄책감과 책임감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은호한테 사실 지윤이만이 그 말을 해줄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은호와 관련된 대본은 거기를 향해 달려갔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그 부분을 조금 더 잘 살려서 썼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친구의 아이를 돌봐주는 기찻길 옆 서점 주인, 나를 바라보지 않는 남자를 짝사랑하는 동화 작가, 손이 부르터도 누군가의 추억을 지키기 위해 가죽을 수선하는 장인. ‘나완비’에는 주연뿐 아니라 조연들까지 평범하지만 선한 영향력을 풍기며 자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어쩌면 우리에겐 동화 같지만 이런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걸까? 살인과 빌런이 난무하고, 배신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스토리가 아니어도 통할 수 있다는 믿음! 그 뒤에는 이 스토리에 동의해 준 완벽한 팀이 있었다.

이 팀이 저한테는 정말 완벽한 팀이었거든요. 이옥규 CP님, 함준호 감독님을 비롯해서 팀이 딱 완성되고 나서는 이 작품의 메시지와 장점이 뭔지 정확히 알았어요. 그래서 너무 감사하게도 설정을 막 이렇게 바꾸라는 얘기가 없었어요. 그간의 고생과는 달리 편성되고, 캐스팅되고 촬영까지 정말 부드럽게 잘 흘러갔죠. 감독님과 소통이 잘 돼서 작업하는 과정이 되게 좋았어요. 매번 회의도 많이 했고, 현장에서 마지막까지 디테일하게 고민하셔서 함께 조율해 나가기도 했고요. 제가 신인 작가지만 굉장히 존중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번은 제가 대본이 7, 8부 넘어가면서 너무 잔잔한 거 아닌가 싶은 맘에 자극적인 버전을 썼었어요. 그때 초고를 보면서 회의하는데 감독님이 이러시는 거예요. “작가님, 우리 이런 드라마 아니잖아요.” 시청률 안 나올까 봐 썼던 건데, 오히려 정확하게 톤을 잡아주셨죠.

 

지은 작가의 본명은 김지은이다. 방송작가협회에 가입할 때, 무려 김지은 10을 기록했다. 그러다 보니 동명이인의 작품이 회자될 때, 축하 인사를 받은 아픈 기억도 있다.

워낙 흔한 이름이다 보니 오해가 생기는 일이 많아서 필명을 안 쓸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나중에 부모님이 우리 딸 작품이라는 걸 아셔야 하니까 성만 떼서 김지은에서 ‘지은’이 됐죠. 무명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네가 쓰는 이야기는 너무 착해. 플러스가 없어”라는 말이었어요. ‘대체 플러스가 뭘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았었는데 제가 마냥 틀리지는 않았었나 봐요. 저희 드라마가 사전 제작이어서 사실 시청자 반응을 몇 달 뒤에 알게 된 건데요. 배우 중 한 분이 대본 리딩 끝나고 와서는 “작가님, 대본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요. 이걸 꼭 시청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어요”라고 해주신 분이 있었어요. 윤유선 선생님은 방송 나가고 나서 좋은 반응 보고 연락을 주셨어요.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은 드라마도 시청률이 나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톤을 잃지 말고 계속 따뜻한 거 쓰세요”라고 해주시는 거예요. 너무 감동이었어요.

길은 모든 걸 기억한다는 걸, 지은 작가 스스로가 증명한 셈이다. 20대 초반에서 40대 중반이 되도록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면서 단단해졌을 그녀는 지금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세요. “정수기 고치러 오신 분이 그 드라마 알더라” 하시면서요. 이 작품으로 ‘일단 효도는 했구나’ 그런 마음이에요. 저희 시아버님은 동네 이발소에 포스터 붙여놓으시겠다며 뽑아달라고 하시고요. 아이와 남편도 너무너무 좋아하죠. 가족들한테 정말 감사해요. 말이 안 되는 긴 시간 동안 이거 하나 하겠다고 버텼는데, 누구 한 사람 정신 차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결과가 안 나오는데도 한결같이 응원하고 지지해 주셨어요. 제가 대본 쓰러 들어갈 때는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육아에 동참해 주셨고요.
요즘 저는 너무 좋아서 들떴다가, 이번이 운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려면 다음 작품도 계속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가 그래요. 어쨌든 잔잔하고 따뜻한 이 톤은 제 색깔이니까 버릴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후반에 폭발력이나 몰입감을 주는 건 숙제가 아닐까 이런 생각도 하고요. 제가 쓰는 한 줄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어요. 제가 너무나 열망했던 세계니까요.

 

열한 살 아들이 등교할 때, 함께 대본 집필을 하러 길을 나선다는 그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드라마를 써 왔던 지은 작가에게는 습작이라는 씨앗이 많다. 이제 그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워 꽃을 피울 차례다. 부디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 줄 따뜻한 드라마로 꽃 피우기를···.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8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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