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 사람
- 2025. 3. 11.
“나라를 잃으면 여인이 총을 들어야 한다.”
몇 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분)이 한 말이다.
이 대사는 여성으로서 고애신이 왜 독립군 활동에 몸을 던지게 됐는지, 그녀의 굳은 의지와 결단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드라마 속 고애신은 독립운동을 벌이는 의병들을 이끄는 의병장으로서 여느 남성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뽐냈다.
남녀유별을 따지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고애신은 자신의 신분과 역할을 넘어서 오로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헌신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애신은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존했던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여성 의병장이던 윤희순(尹熙順, 1860∼1935) 의사가 그 주인공이다.
글. 박건호(역사작가) 일러스트. 김성삼
항일 의병 운동과 안사람 의병장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점차 노골화됐다. 이 침략에 맞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것이 의병 운동이었다. 항일 의병 운동은 크게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의 세 단계로 나눈다. 먼저 을미의병은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과 그 직후의 단발령에 반발해 양반 유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것이고, 을사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발해 일어난 것이며, 정미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일어난 한말 마지막 의병이다. 특히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의 일부가 합류함으로써 규모와 성격 면에서 의병운동이 의병전쟁으로 발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15년 정도 이어진 의병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유인석, 이소응, 김복한,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민긍호, 안규홍 등으로 한결같이 남성들이었다. 그런데 이 의병투쟁 역사에서 여성 의병장으로서 활동한 유일한 인물이 바로 윤희순이었다.
윤희순은 1860년(철종 11년) 한성부 낙동(현 서울시 을지로 2,3가)에서 윤익상과 덕수 장씨 사이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유학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윤희순은 16세 되던 1875년 유홍석의 장남이자 유인석의 조카인 유제원과 결혼해 강원도 춘천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시아버지 유홍석, 유홍석과 사촌지간인 유인석은 모두 의병운동을 일으킨 인물들로 이후 윤희순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시아버지 유홍석, 남편 유제원은 춘천의 유생들과 함께 이소응을 대장으로 추대해 의병운동에 나섰다. 윤희순이 의병운동에 뜻을 둔 것은 이때부터였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의병운동으로 열 달간 집을 비운 사이 희순은 매일 아침 그들의 무사 귀환과 의병의 전승을 기원하며 기도했다. 또한 마을 여성들을 모아놓고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을 함께 도울 것을 주장했고, ‘일본이 아무리 강해도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물리칠 수 있다. 여자라도 나라를 사랑할 줄 알며, 남녀가 유별해도 나라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여자들도 의병에 참여하고 의병대를 도와줘야 한다’라고 말하며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에게 의병활동을 촉구했다.
‘안사람 의병가’의 내용은 이렇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 집 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지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 거니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우리 조선 아낙네들 나라 없이 어이 살며 힘을 모아 도와주세 만세만세 만만세요
우리 의병 만세로다
여성의병대 활동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1907년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이에 대한 반발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유홍석은 아들 유제원과 함께 춘천에서 다시 의병 600명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때 윤희순은 을미의병 때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의병에 참여했던 이들의 부인, 시댁인 고흥 유씨 집안의 여성들, 그리고 향촌 여성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금해 그 돈으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한 후, 춘천시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했다. 또한 여자의병 30여 명을 모집해 의병대를 조작하고 의병 훈련을 주도했다. 비록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후방에서 의병들을 적극 지원하면서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밀고자를 꾸짖었다. 윤희순은 이 의병활동 중에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는데, 이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의병항쟁에도 불구하고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에 유홍석은 만주로 이주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운 후 아들 유제원과 함께 먼저 길을 떠났다. 윤희순은 가산을 정리한 후 뒤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일본 경찰과 앞잡이들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이들은 윤희순에게 유홍석의 행방을 물었는데, 모른다고 하자 어린 아들 돈상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자식을 죽이고 내가 죽을지언정 큰일 하시는 시아버지를 죽도록 알려줄 줄 아느냐”며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일본 경찰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윤희순이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아들 돈상, 민상, 교상 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해 남편과 시아버지를 만난 것은 1911년으로 이미 그녀의 나이 52세였다. 유홍석의 사촌 동생인 의병장 유인석도 1911년 유씨네 처갓집, 친척, 부하, 문인, 제자, 친구들 모두 40~50가구를 중국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 난천자로 이주해 왔는데, 윤희순 역시 의병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윤희순에게 맡기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1912년 초에는 환인현 팔리전자 취리두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윤희순은 항일운동을 하기 전에 먼저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산으로 올라가 황무지를 개간하고 강물을 끌어들여 논을 만들고, 중국인들에게도 벼농사를 보급했다. 한편 윤희순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어린이 등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회영, 우병렬 등의 도움을 받아 환인현 보락보진 남괴마자에 동창학교 분교인 ‘노학당(老學堂)’을 세웠다. 이곳에서 김경도, 박종수 등 50여 명의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다. 그녀는 일본과 싸워 독립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중국인도 함께 교육했다. 한·중 연합을 해야 독립할 수 있다는 혜안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노학당은 설립 3년 만인 1915년 폐교되고 만다.
힘든 항일운동을 하는 와중에 1913년 시아버지 유홍석이, 1915년에는 유인석과 남편 유제원마저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고 노학당까지 폐교당한 이곳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었던 윤희순은 1915년 막내 아들 교상을 데리고 환인현을 떠나 무순 포가둔으로 이주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그녀는 조선독립단과 조선독립단가족부대를 조직하고, 조선독립단학교를 설립했다. 조선독립단은 윤희순의 뒷받침하에 아들 유돈상을 중심으로 조직됐다. 윤희순 모자는 항일선전을 강화해 중국인들을 각성시켜 연합투쟁을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조선독립단을 한중 연합으로 조직했다.
그러던 중 군자금 모금과 흩어진 독립군의 재건을 위해 힘쓰던 장남 유돈상이 1935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으로 같은 해 7월 19일 순국했다. 윤 의병장은 장남의 순국에 충격을 받고 식음을 전폐하다가 그해 8월 1일 40여 년 독립운동의 막을 내리고 순국했다. 그녀 나이 76세로 1911년 만주로 이주해 항일운동을 전개한 지 25년째 되는 해였다.
윤희순의 업적은 단순한 독립운동을 넘어서 여성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민족정신을 문화적으로 고취시킨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그녀의 삶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특히 여성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애국심을 촉구한 사례로 평가받는다.
숨을 거두기 전 윤희순은 <해주 윤씨 일생록>이라는 회고록을 남겼다. 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의 삶과 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이 회고록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가슴 깊이 새길 내용이다.
“모든 정신을 발끝에서부터 머리까지 조심히 있어야 하느니라.
매사는 시대에 따라 옳은 도리가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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