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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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파의 역사가 빚은 빵, 크루아상

대격파의 역사가 빚은 빵, 크루아상

오늘날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즐겨 먹고 있는 간식인 크루아상(croissant)은 그 모습이 마치 초승달을 닮았다. 그런데 이 곱고 탐스러운 자태와 달리 크루아상은 전쟁에서 탄생한 음식이다. 바로 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 즉 터키를 막아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Writer_ 도현신 작가


오스만 제국의 비엔나 침공

지금의 터키는 물가 폭등과 환율 하락 등의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불과 300년 전만 해도 세계를 호령하던 나라였다. 터키가 공화정을 도입하기 이전, 왕정 체제였던 오스만 제국 시절에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에 모두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있을 만큼 오스만 제국은 강성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은 영토 확장 과정에서 유럽 대륙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멀리 떨어진 영국조차 오죽하면 “오스만 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16세기 초, 오스만 제국은 현재의 그리스와 알바니아를 비롯한 동유럽 국가 대부분을 정복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1529년 동유럽과 서유럽의 관문 역할을 하는 지역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로 쳐들어갔다. 비엔나 공격에 동원된 오스만 군대는 약 10만 명에 달했는데, 멀리 이집트에서부터 페르시아 국경을 지키던 병력까지 포함된 대규모 인원이었다.

그러나 비엔나 시민들은 오스만의 대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때마침 폭우까지 연일 쏟아졌는데, 그 때문에 도로가 진흙탕이 되면서 오스만 군대가 먹을 식량을 싣고 오는 마차들의 바퀴가 진흙탕에 빠져 제때 도착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두꺼운 삼중 성벽을 무너뜨린 오스만의 거포 마호메타도 도착하지 못했다. 마호메타의 무게는 자그마치 10톤 이상이나 되었는데, 역설적으로 그 무거운 중량 때문에 이 거포를 싣고 올 마차가 진흙탕의 수렁에 빠져 도저히 머나먼 비엔나까지 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포 같은 공성무기가 없으니, 10만 명의 대군이 있어도 비엔나의 두터운 성벽을 뚫을 수가 없었고, 시간이 갈수록 비엔나 함락은 불가능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결국 오스만 군대는 비엔나 공략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비엔나를 점령해 유럽의 서쪽으로 쳐들어가려는 오스만의 야심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1차 비엔나 공방전을 겪고 154년 후인 168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슬람교 국가의 군주를 부르는 이름)인 메메드 4세는 총애하는 신하인 무스타파 파샤에게 1차 비엔나 공방전 때 보다 더 많은 병력인 15만 명의 대군을 주며 그를 비엔나 공략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오스만의 15만 대군은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를 받으며 북쪽으로 진격했다. 1683년 7월 7일 비엔나를 눈앞에 둔 오스만 군대는 도시를 포위하고 성벽 밑에 폭탄을 설치해 성벽을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비엔나 측은 땅 속으로 갱도를 파서 오스만 군대가 성벽 밑에 설치한 폭탄을 제거하는 것으로 맞섰다. 그러나 비엔나를 지키는 수비군은 그 인원이 고작 1만 5천 명에 불과했던 관계로 수적으로 10배나 더 많은 오스만 군대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스만 군대는 결국 성벽 지하에 폭발물을 설치해 성벽을 부쉈다. 그리고는 비엔나 성을 완전히 포위한 채 성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식량을 차단시켰다. 식량이 점점 떨어지자 비엔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평소에는 전혀 먹지도 않았던 개나 고양이를 거리낌 없이 먹고 성 안으로 날아드는 비둘기까지 잡아먹을 정도였다. 급기야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제빵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려 오스만 군대의 군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을 본떠 빵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크루아상이다”

 

전쟁의 승리가 만든 음식, 크루아상

운명이 비엔나 사람들을 버리지 않은 걸까. 유럽 각지에서 8만 4천 명의 동맹군이 결성되어 비엔나를 도우러 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는 폴란드 국왕 얀 3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 3만 7천 명이었다. 특히 폴란드 군대에는 당시 유럽 전역에 무적의 부대로 명성을 떨치던 기마부대인 윙드 후사르 2만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윙드 후사르는 1575년 헝가리 왕자인 스테판 바토리가 폴란드 왕으로 추대되면서 만들어진 부대로 독수리 날개가 달린 갑옷을 입고 5미터가 넘는 긴 창으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였다.

비엔나 사람들이 오스만 군대에 포위되어 하루하루 굶주림에 시달리던 1683년 9월 11일 밤, 마침내 8만 4천 명의 동맹군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비엔나 서쪽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683년 9월 12일, 유럽 동맹군과 오스만 대군 사이에 일대 결전이 벌어졌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동맹군의 보병부대, 특히 윙드 후사르의 저돌적인 돌격에 오스만 군대는 크게 패한다. 동맹군의 기세에 밀린 오스만 군대는 결국 비엔나 점령을 포기한 채 자신들의 목숨이라도 건지기 위해 허겁지겁 후퇴하고 말았다. 비엔나 사람들을 비롯해 온 유럽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했다. 수백 년 동안 유럽 기독교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을 기독교 동맹군이 단합해 물리쳤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후, 피터 벤더(Peter Wender)라는 제빵사는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려 오스만 군대의 군기에 그려진 초승달 모양을 본떠 빵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크루아상이다. 크루아상은 이후 오스트리아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되었고, 오스트리아 공주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가면서 요리법도 함께 가져가 프랑스에서도 널리 퍼졌다. 그리고 프랑스 왕실이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무너지자 왕실에서 일했던 요리사들이 거리로 나와 음식점을 차리면서 크루아상은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친숙한 음식으로 또 한 번 전파되었던 것이다.

 

[ 출처 : 청아람 11+12월호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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