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과 창작 사이, K-콘텐츠가 현재 선 자리
- 문화
- 2024. 9. 24.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7월호]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백상예술대상, 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
MBC 시청자평가원, JTBC 시청자 위원 역임
저서 ≪드라마 속 대사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팔 때가 있다≫,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등
칼럼 기고, 방송, 강연 다수
하이브-민희진 사태가 K-콘텐츠 업계에 시사하는 것들
거대 기획사 하이브와 산하 레이블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 사이에 벌어진 분쟁은 K-팝을 넘어 K-콘텐츠 전반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이제 산업으로 성장한 K-콘텐츠가 향후 경영과 창작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경영권 문제 vs 멀티 레이블 문제
민희진 어도어 대표는 법원이 의결권 행사 가처분 신청을 인용함으로써 일단 대표 자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법원의 판단은 한마디로 말하면, “배임은 아니지만 배신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이브로부터 어도어를 독립시키고 지배하려는 방법을 모색하긴 했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건 아니라 배임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로써 하이브와 민희진 대표의 날 선 대결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다. 민희진 대표는 기자회견을 열어 하이브에 화해를 제안했지만 하이브 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이 사태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말해준다.
이번 사태는 먼저 하이브 측에서 민희진이 경영권을 탈취하려고 모의했다는 걸 공개적으로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하이브의 이런 주장에 대해 민희진은 이 사태의 본질이 경영권 문제가 아니라 ‘멀티 레이블’ 문제라고 주장했다. 즉 뉴진스와 유사한 콘셉트의 아이돌들이 같은 멀티 레이블에서 공공연히 나오는 것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것에 대한 하이브 측의 대응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멀티 레이블의 존재 이유가 제왕적 리더십에 의해 비슷비슷해질 수 있는 아티스트들의 색깔을 사전에 막기 위한 대안적 선택이었다는 걸 떠올려 보면 민희진의 주장이 일견 이해되는 면이 있다. 뉴진스는 결국 이 멀티 레이블이라는 대안의 성공적인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무, 노래, 이미지까지 비슷한 콘셉트의 아이돌이 같은 하이브 산하 멀티 레이블에서 나온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지만 경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이브 측의 이런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경영적인 성과의 극대화는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데서 나오기보다는(결국 그건 리스크도 커지기 때문에) 이미 성공한 것들을 조합해 리스크를 줄여나가는 데서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 문제는 이제 거대해져 경영적 판단이 중요해진(최근 하이브는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됐다) 하이브가 창작이 중요한 콘텐츠 산업 사이에서 빚어진 갈등과 파열음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K-팝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제 점점 글로벌 입지를 마련하고 산업적인 규모를 갖추기 시작한 K-콘텐츠 전반의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도 나타나는 유사 콘셉트의 문제들
우리네 콘텐츠 산업에서 이른바 ‘쏠림현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뭐 하나 잘 되면 비슷한 콘셉트나 소재를 가진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결국은 그 소비만을 가속하는 결과를 만들어 업계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져 왔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조폭’ 영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사한 조폭 콘셉트를 가진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바 있고, 1990년대 트렌디 드라마 시절에는 틀면 나오는 멜로드라마들이 TV를 가득 채우기도 했다. 물론 이런 일련의 작품들을 ‘베끼기’로 보긴 어렵지만, 지나친 트렌드의 추구가 만들어내는 쏠림현상은 지금껏 K-콘텐츠 산업에는 늘 먹구름으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이런 트렌드를 추구하는 흐름은 지금도 그대로다. <오징어 게임>이 글로벌 신드롬을 만든 이후, 비슷한 게임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들이 많이 등장했다는 걸 우리는 부인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피라미드 게임>이나 최근 공개된 <The 8 Show>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물론 이 작품들의 차별성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소재라는 비슷한 틀거리가 대중들에게는 비슷하게 다가오는 건 사실이다. 또 <인간수업>의 성공 후 학교 폭력, 마약 같은 청소년들의 문제를 소재로 하는 학원물들도 급증했다. <하이쿠키>, <소년비행>, <하이라키>, <약한영웅>, <3인칭 복수>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쏟아져 나온 <내 남편과 결혼해줘>, <이재, 곧 죽습니다> 같은 회귀물도 쏟아져 나왔다. 물론 이러한 뜨는 장르나 소재에 편승하는 건 일종의 트렌드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만 보다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 업계의 흐름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K-콘텐츠의 성장을 이끌 수 있을 게다. 이미 시즌제가 정착하면서 생겨나는 ‘자기복제’의 욕망은 그런 점에서 좀 더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시즌제라는 시스템은 사실상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경영적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하게 여겨지는 선택들은 창작에 있어서는 독이 될 수 있다.
최근에 K-로맨스로도 주목받고 있는 한국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는 한때 너무 익숙한 틀거리를 반복하면서 ‘클리셰 범벅’이라는 비판 아래 고개를 숙인 적이 있었다. 신데렐라 스토리와 사내 연애, 동거 연애 등등 일종의 코드화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생긴 문제였다. 하지만 대중적 비판에 직면하면서 멜로 장르는 사회적 메시지를 더해 넣기도 하고, 또 판타지 장르를 장치로 가져오기도 하는 등 변화를 시도했고 그 결과 이런 문제들을 넘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창작에서 이런 문제들은 한 번 넘어선다고 영원히 유지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필요한 게 바로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업다각화는 필요하지만, 다양성도 확보되어야
이번 사태는 경영과 창작의 갈등을 넘어, 음반 밀어내기나 랜덤 포토카드 같은 지나친 상업화가 야기하는 문화 산업의 부작용 문제도 거론됐다. 초동 음반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판매상들에게 물량을 떠넘겨 구매하게 하고 그들이 판매할 수 있도록 아티스트들이 팬 사인회 같은 각종 이벤트를 하는 일이나, 포토카드를 소장하고 싶은 팬심을 이용해 랜덤 포토카드를 넣은 음반을 내놓음으로써 다량의 음반을 사게 만드는 방식 같은 사업적 선택들이 산업 자체를 기형적으로 뒤틀어 놓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나친 상업화가 야기하는 산업의 왜곡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발생하는 일들이다. 극장에서의 상영관 몰아주기나 글로벌 OTT로 콘텐츠들이 쏠리는 현상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최근 시즌4 역시 1천만 관객을 돌파하며 프랜차이즈 영화로서 입지를 굳건히 한 <범죄도시>의 경우 이번 시즌에 상영관의 70%를 몰아줬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멀티플렉스 측에서는 관객들이 많이 보는 영화 위주로 편성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극장이 상업적 목적에만 맞춰져 영화를 걸어준다면 다양성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또 최근 대자본을 가진 글로벌 OTT로 드라마 기획이나 대본들이 쏠리는 현상 또한 마찬가지로 콘텐츠 다양성을 해칠 수 있는 일이다. 구독자를 끌어모으고, 그들의 시청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들 작품은 상당 부분 자극과 선정성을 더한 상업적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보다 다양한 작품들이 제작될 수 있으려면 보다 다양한 플랫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콘텐츠 생태계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번 사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젠더 관련 이슈다. 민희진 대표의 목소리가 마치 몇 안 되는 여성 콘텐츠 제작자의 목소리처럼 들리게 된 건 콘텐츠 업계의 기울어진 성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미 글로벌 시장으로 들어와 있는 콘텐츠들이 산업적으로도 점점 중요해지는 젠더 감수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여성 콘텐츠 제작자들이 산업 곳곳에 포진해 균형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는 물론 치열한 진흙탕 싸움 같은 감정적인 갈등들이 표출됐지만, 그보다는 좀 더 대승적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현재의 K-콘텐츠가 마주하고 있는 문제들을 보다 명확히 바라보는 기회로 삼는 편이 건설적이다. 이제 본격적인 산업의 구조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사업적 성취를 가져가면서도 그 기반일 수 있는 다양성을 담보하는 창작 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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