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엔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 나의 무기
- 사람
- 2024. 10. 10.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스물다섯 살에 처음 드라마를 썼다. 유난히 이른 데뷔였다. 작가는 운이 좋았다 말했지만, 어찌 운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데뷔 후 20년 넘게 거의 매년 드라마를 썼고, 단 한 달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다. 지독하게 성실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날에도 가만히 앉아 책상 앞을 지켰다. “제가 고독을 견디는 능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이 능력 덕분에 지금까지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최윤정 작가. 그간 가족드라마, 청춘 로맨스, 일일극 등을 섭렵해 온 작가는 최근 재벌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 <화인가 스캔들>로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재벌 이야기 뻔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작가는 그 뻔한 소재로 반전의 반전을 만들어 냈다. 그 반전은 우리의 편견을 겨냥한 것이라 더욱 통쾌했다.
디즈니+ <화인가 스캔들> 최윤정 작가
글. 정윤미 편집위원 사진. 김용철 장소. 로마나 청담
<화인가 스캔들>은 골프선수 출신 오완수(김하늘 분)가 화인그룹 후계자와 결혼하면서 재벌가의 비밀을 파헤쳐 나가는 이야기다. 완수는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돈을 곧 신분으로 아는 재벌가에서 완수는 대놓고 무시당한다. 재벌 회장인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완수를 방해하며, 나대지 말라고 겁박한다. 하지만 완수는 어떤 상황에서도 눈 하나 꿈쩍 않는다. 시어머니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안 됩니다’라고 외친다. 이제껏 재벌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캐릭터다.
디즈니+ <화인가 스캔들> 공식 포스터
재벌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잖아요. 재벌들이 가진 특권의식을 듣다 보면 정말 화가 났어요. 만약 화인그룹 같은 재벌이 있다면, 그래서 누군가 화인가의 며느리가 된다면, 오완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완수는 어떤 위협적인 상황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쓴 게 <화인가 스캔들>이에요.
근데 그동안 제가 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항상 이랬어요. 가진 게 없어도 당당하고, 배운 게 부족해도 자기 주관이 뚜렷해요. 제가 드라마 데뷔를 1992년에 했거든요. 근데 그때는 이런 캐릭터를 쓰면 너무 되바라진다, 현실에서 이렇게 살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냐, 다들 그랬어요.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져서 제 드라마 속 주인공을 많이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이렇게 바뀌는 데 30년이 걸렸네요.
<화인가 스캔들>에는 그간 재벌 드라마에서 익히 보아왔던 소재들이 등장한다. 권력 다툼, 치정, 출생의 비밀 같은 요소들이 얽혀 있고, 선과 악이 대결하고 악이 심판받는다는 구도도 명확하다. 이 때문에 새롭지 않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방송 끝나고 신문 기사나 댓글을 읽어보니까 제 드라마가 막장이다, 클리셰다, 이런 말들이 있더라고요. 솔직히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친한 선배 언니한테 마음을 털어놨는데, 그 선배가 이랬어요. 재벌이 나오고 선과 악이 나오니까, 그런 껍데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봤던 드라마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이 드라마는 사건만 쫓아가는 게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어서 너만의 색깔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해. 선배의 이 말 덕분에 제가 많이 치유를 받았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를 키워주신 외할머니가 성경책만 보시는 분인데, 일일연속극을 그렇게 좋아하셨거든요. 매일 8시 반만 되면 <울밑에 선 봉선화> 보면서 전인화 씨가 불쌍하다고 막 울고 그러셨어요. 할머니한테는 그 시간이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었던 거예요. 저는 외할머니가 연속극 챙겨볼 때마다 제가 작가가 된 걸 가장 보람 있다고 느꼈거든요. TV는 영화랑 다르잖아요. TV 프로그램은 5천만 국민 중에서 적어도 3천만 이상을 위해 만들어져야 하고요. 그래서 TV 작가라면 TV를 많이 보는 세대의 정서를 만족시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최윤정 작가는 1992년 드라마작가로 데뷔 후 2014년까지,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만큼 거의 매년 드라마를 썼다. 하지만 2014년 <사랑만 할래> 이후 다시 작품을 내놓기까지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긴 공백을 깨고 나온 작품이 바로 <화인가 스캔들>. 작가 자신도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한다.
제가 마지막으로 일일극을 썼던 그 무렵이 연속극이 없어지던 과도기였어요. 방송사 여기저기에서 없어진다는 얘기가 나오고, KBS 연속극은 몇 년 치 라인이 다 잡혀있다 그러고. 그러니까 저도 이제 미니시리즈를 다시 써야겠다 싶어서 시작한 게 <화인가 스캔들>이었거든요. 2018년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방송되기까지는 6년이 걸렸어요. 그 사이에 제작사만 세 번 바뀌었어요. 처음에 계약한 A 제작사와는 편성이 계속 밀리면서 계약이 종료됐고, 그다음에 B 제작사와 계약을 했는데요. 여기서는 <화인가 스캔들> 말고 다른 작품을 보고 싶다 해서 제가 주말 연속극용으로 써둔 걸 줬거든요. 근데 당시에 연속극이 없어지는 분위기다 보니, 회사는 미니시리즈 하고 싶다면서 좀 얼버무리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결국 B 제작사와도 작업을 안 하게 됐어요. 당시에 저는 계약 조건에 따라 계약이 종료된 거라 생각하고, C 제작사와 다시 계약을 했거든요. 그리고 디즈니플러스 편성까지 받았는데, B 제작사에서 다시 연락이 온 거예요. 본인들이 <화인가 스캔들> 하겠다고요. 결국 어떻게든 해결을 하긴 했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다 보니 6년이나 걸려 버렸네요.
작가협회랑 하는 인터뷰라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린 거예요. 이번 일 겪으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특히 신인 작가들 생각이요. 저처럼 20년 넘게 일한 중견작가도 이렇게 힘든데, 신인 작가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사실 신인 때는 방송이 계속 미뤄져도 이유를 정확히 알기도 어렵거든요. 막막한 상태로 그냥 계속 기다리는 거예요. 저도 6년을 기다리면서 40대에서 50대로 넘어갔어요. 작가로서는 제일 좋은 나이대를 흘려보낸 거니까 억울하죠. 너무 아깝고.
그동안 지상파 TV와 작업해 온 작가는 <화인가 스캔들>로 처음 OTT 플랫폼과 손을 잡았다. 자신의 드라마를 전 세계에 선보인 것은 작가로서의 큰 보람이었지만, 한편으론 거대 공룡의 권력이 무엇인지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OTT는 제작사가 작가랑 계약해서 작품의 윤곽이 어느 정도 나오고 캐스팅도 결정이 된 다음에야 편성을 확정 지어 주거든요. 이렇게 모든 게 결정이 되고 나면, 그때 새로운 계약서를 보내요. 저작권료 안 받는 조건의 계약서를요. 만약에 제가 안 한다고 하잖아요? 그럼 편성을 안 줘요. 그러니까 작가가 안 받을 수 없는 딱 그 타이밍에 계약서를 주는 거예요. 그래도 저는 얘기했어요. 난 이렇게는 못 한다. 저작권은 전 세계 모든 작가의 권리이고, 나는 100원이라도 받아야겠다. 저작권료 안 받는 건 작가로서의 책임을 유기하는 거라고, 제가 끝까지 저항했어요. 그래서 결국 저작권용 계약서를 따로 썼어요. 원래 저작권은 사후 70년까지 보장되는 건데, 이렇게는 절대 못 해주겠대요. 저는 끝까지 저항하고 싶었는데, 어떡해요 편성이 걸린 문제니. 저도 한발 양보했죠. 대신 저작권료 명목으로 따로 계약서를 쓴 거죠. 이렇게나마 선배로서 할 일은 조금 한 것 같아요.
최윤정 작가는 대학 4학년 때 유아 프로그램에 관한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을 들고 방송사 PD를 만난 것이 계기가 돼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구성작가 4년 차 때 드라마라는 걸 처음 쓰기 시작했고, 그때 이후로 줄곧 승승장구였다. <짝>, <프로포즈> 등을 히트시킨 데 이어, <좋은 걸 어떡해>, <황금마차>, <세자매> 등의 일일드라마로 중년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시청률과 화제성을 담보하는 작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수식어가 아니었다.
보통 일일드라마는 설거지하면서 본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제가 쓴 일일극은 밥도 못 먹고 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스토리텔링. 이게 제가 가진 최고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이렇게 써야 시청률이 많이 나오겠지, 사람들은 이런 캐릭터 좋아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고 쓴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냥 문득 어떤 이야기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짝>에서는 줄줄이 과부들이 나오거든요. 과부, 이혼녀, 올드미스 이런 것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서 쓴 드라마예요. <프로포즈>에는 미혼모 자녀지만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자주인공이 등장하고요. <좋은 걸 어떡해>에서는 남자주인공이 남의 애를 가진 여자와 살겠다면서 부모와 막 싸우고 그래요. 이런 인물에 누가 공감을 하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꼭 공감을 받는 캐릭터만 써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세상에 없는 캐릭터라 해도 이들을 통해서 1cm라도 미래로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왜 필요하겠어요.
일일극은 보통 100편이 넘는다. 최윤정 작가가 쓴 <황금마차>는 무려 201부작이다. 이렇게 호흡이 긴 드라마를 수년에 걸쳐 꾸준히 써온 것은 그저 성실함만으로 되는 일은 아닐 터. 어떤 마음, 어떤 각오로 지난 시간을 지켜왔는지 궁금했다.
요즘은 건강이 많이 회복됐는데, 30대 중후반 때는 허리 디스크, 목 디스크 다 터져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어요. 병원 가서 마취 주사 맞고 복대 감고 앉아서 원고 썼어요. 스테로이드를 하도 먹어서, 그때 사진을 보면 얼굴이 막 달덩이 같아요. 친구들이 한창 결혼할 무렵에도 결혼식 한번 가본 적이 없고, 조카들 돌, 생일 이런 것도 챙겨본 적 없어요. 그럼 하루 종일 원고만 쓰느냐, 아니에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때도 있어요. 근데 움직이면 안 되는 거예요. 누굴 만나서도 안 돼요. 마치 내가 전염병 환자인 것처럼요. 그런데 이 단절이 저를 집중하게 만들어요. 이 고독함 속에서 글이 나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재밌어, 밥도 안 먹고 봤어, 하는 드라마를 쓸 수 있는 거예요. 근데 고독을 견디는 건 훈련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에요. 타고나야 해요. 혼자서 100년도 있을 수 있는 능력. 저는 이걸 타고난 거 같아요.
스스로를 깊은 고독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그 고독의 시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한다. 작가에게 고독은 매일 먹는 밥과 같은 거라고. 그렇다 해도 한 번쯤은 고독 탈출을 꿈꿔본 적 없을까. 어쩌면 다음 드라마에서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에는 양자역학에 관한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우리는 몇 개의 세상에 살고 있을까, 이런 이야기요. 이제껏 저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가로만 살았잖아요.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있는 내가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작가가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작가가 될 것 같지만, 그래도 궁금해요. 다른 세상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더 행복할까?
* 프로그램 이미지 제공_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최윤정 작가
데뷔
1992 MBC <김가 이가>
방송
1994~1998 MBC <짝>
1996 MBC <아이싱>
1997 KBS2 <프로포즈>
1997~1998 KBS2 <웨딩드레스>
1999 KBS2 <초대>
2000~2001 KBS1 <좋은 걸 어떡해>
2001~2002 KBS2 <아버지처럼 살기 싫었어>
2002~2003 MBC <황금마차>
2003~2004 SBS <흥부네 박터졌네>
2005 SBS <사랑공감>
2005 MBC <사랑찬가>
2007 SBS <사랑하는 사람아>
2010 SBS <세자매>
2014 SBS <사랑만 할래>
2024 디즈니+ <화인가 스캔들>
수상내역
1995 MBC 연기대상 작가상 <짝>
2000 KBS 연기대상 작가상 <좋은 걸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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