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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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게 얼굴이 있다면? EBS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모든 것의 시작은 언제나 ‘대화’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EBS가 10년 만에 내놓을 경제 교육 다큐멘터리 만들기”.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나와 박재영 PD, 글과 구성을 맡은 김미란 작가를 비롯한 제작진은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 기획 단계부터 방송 직전까지 ‘돈’에 대해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눴다.

EBS 이혜진 PD

EBS <건축탐구 집>, <스페이스 공감>,
다큐 프라임 <예술의 쓸모>, <여성백년사>, <돈의 얼굴> 등 연출


“돈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떤 얼굴일 것 같아요?”

처음으로 제작진이 다 함께 모인 자리에서 김미란 작가가 무심코 던진 질문이 프로그램의 방향을 잡는 데에 큰 힌트가 되었다. 나는 “겉으로 보기엔 나와 굉장히 친한 것 같지만, 진짜 마음은 결코 내어주지 않는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답했다. 누구는 ‘차은우’처럼 엄청난 미남이라고 답하고 누구는 ‘뚱뚱한 중국 상인’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듣고 있자니, 이 질문의 답이 ‘돈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에 대한 이미지가 각자 영 다르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에 대해 대화를 하면 그 사람이 어떤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경제 원리뿐 아니라, 돈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도 잘 담아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은 그렇게 시작했다.

경제의 ‘ㄱ’부터 배우기

제작진이 서로 대화를 (너무!) 많이 나누다 보니,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사이’라는 말이 뭔지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다 알게 된 사실.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 제작진 중에 ‘경제’를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평생 재테크 한번 시도해 보지 않고 ‘차곡차곡’ 거지가 되었다는 사람, 최고점에서 아파트를 매입한 영끌족, 고정금리와 변동금리를 몰라서 그냥 아무거나 찍어서 대출받았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름대로 배울 만큼 배운 우리가, 대체 왜 이토록 경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걸까. 그렇게 돈을 벌려고 수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말이다. 추측건대 아마도 경제는 어렵고 복잡하다는 편견 때문이 아닐까. 내 경우엔 그런 복잡한 얘기는 접어두고, 그냥 운 좋게 큰돈이 굴러들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경제의 ‘ㄱ’도 모르는 상태에서 많은 경제학자들을 만났다.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최상엽 교수는 두 달 동안 매주 수요일마다 제작진들에게 경제 강의를 해주었다.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분명히 고등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들이라는데 어쩐 일인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실질임금’이니 ‘명목임금’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동안 나만 이걸 모르고 월급을 받아온 거야?”하는 생각에 살짝 배신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용돈을 받아 쓰던 학생 시절의 경제 공부와, 몸을 갈아 돈을 버는 지금의 경제 공부는 영 달랐다. 아마도 절실함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너무 모른다’는 부끄러움은 잠시, 우리와 같은 시청자들이 꽤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내 월급의 가치도 눈치채지 못하는 우리 같은 어른들을 위해 경제이론을 알기 쉽게, 생활 밀착형으로 풀어내자!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

유동성, 금리, 인플레이션, 빚, 전자화폐, 투자심리. 1부부터 6부까지의 아이템은 경제학 교수들의 자문을 통해 정했다. 현대인들이 꼭 알아야 하는 경제 개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경제 개념의 교육도 중요하지만,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도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돈이 흐르는 현장과 경제이론을 잘 맞물려 보여주고자 했다. 레바논의 은행 강도 현장, 최초의 명목 화폐가 탄생한 중국의 도시, 타국에서 어렵게 번 돈을 가족에게 이체하고 싶지만 계좌가 없어 매번 직접 멀고 험한 길을 오가야 하는 베냉의 소년 등을 찾아서 촬영을 시작했다.

그렇게 국내외의 많은 이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과 돈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눴다. ‘돈’이라는 소재가 참 묘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엔 대놓고 돈 얘기를 한다는 것을 조금 어색해했다. 처음 만난 이에게 “돈 좋아하세요?” 같은 질문을 던지는 나 역시 왠지 민망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로 돈에 대한 생각을 나누게 되면 그 어떤 주제보다도 상대에 대해 잘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세계 경제가 흘러 흘러 우리나라 조그만 동네의 개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담고 싶어 찾아갔던 부산의 한 방열복 제조 공장. 많은 기사님들이 일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중장년층 여성이거나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들과 일주일 동안 함께 지내며 돈에 대해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미얀마 출신의 품질팀장은 “돈은 착하다”고 말했다. 내가 돈을 속인 적도 없고 돈도 나를 속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의 미소에서 착실히 살아온 인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반면 한 50대 기사님은 “돈은 그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버는 것”이라 말했다. 웃는 그 얼굴 뒤로 일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시간들이 비쳤다. 인플레이션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었지만, 그렇게 인생을 배우기도 했다. 돈에 대한 나의 대답들에선 어떤 모습이 보일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의 내레이션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이들의 퇴근 장면에 흐른다. 염혜란 배우가 따뜻한 목소리로 어쩐지 모두를 위로하는 듯 말한다. “여러분은 인생에 몇 번의 인플레이션이 있었나요? 갑자기 찾아온 돈의 냉담한 얼굴을 어떻게 맞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떻게 그 그래프의 가파른 높이를 지나 오늘에 도착하셨습니까.”

신의 한 수, 염혜란

방송 후 가장 많이 받은 시청자 피드백은 ‘염혜란 배우가 신의 한 수였다’는 반응이었다. 제작진끼리도 우리가 가장 잘한 일은 염혜란 배우를 돈의 페르소나로 삼았다는 부분이라고 입을 모았다. 돈의 다양한 얼굴을 연기로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친절한 은행원, 무기력한 은행원, 수상한 채굴자, 평범한 주부, 껌 씹는 복부인 등등 총 9개의 캐릭터가 프로그램 곳곳에 등장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 몇몇 캐릭터는 염혜란 배우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 추가되기도 했다. 배우와 함께 대화하며 캐릭터를 잡아나가는 작업은 처음이라 굉장히 설레고 신기했다.

배우가 프리젠터로 등장해 시청자를 향해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다양한 아이디어를 모았다. 유동성이나 신용창조, 예대금리차 등의 개념을 배우의 연기와 함께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대출을 받으러 온 복부인(염혜란)과, 예금을 하러 온 주부(염혜란)가 은행에서 서로 스치며 예대금리차를 설명하는 식이었다. 시청자에게 친숙한 염혜란 배우의 섬세한 연기 덕에 자칫 딱딱할 수 있는 경제 교육 다큐멘터리가 조금 더 올록볼록해질 수 있었다. (촬영 내내 최소한 배우가 부끄러워할 작품은 되지 않아야 한다고 되새겼는데, 부디 내 바람이 이루어졌길 바란다.)

‘돈’ 대신 얻은 것

모든 것의 끝 역시 언제나 ‘대화’다. 방송이 나가고도 우리는 매일 같이 만나 수다를 떨었다. 함께 작업을 하며 어떤 점이 아쉬운지, 후회스러운지, 또 행복했는지. 서로 어떤 때 미웠고 예뻤는지 했던 말을 또 해가며 헤어지기 싫은 사람들처럼 여전히 질척거린다.
기획 초기에 스태프들을 섭외하면서 내가 날렸던 공수표가 있다. “우리 이번 기회에 돈 공부해서 같이 부자 돼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역시 “그래서, 제작진은 돈 좀 벌었나요?” 혹은 “비트코인 샀나요?”였다. 아쉽게도 부자가 되는 일은 우리 중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통장 잔고를 신경 쓰기에 우린 너무 바빴다. 그리고 지금도 만나기만 하면 서로 “그때 그거 살걸!”이라는 말을 삼천 번째 나눈다. (때때로 작가님은 내 공수표를 기억해 내며 사기꾼이라고도 한다.)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다큐 프라임 - 돈의 얼굴>을 제작하며 배우고 얻은 것은 많다. 그중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바로, ‘모든 해답은 우리의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이다. 막다른 길인 것 같아도 옆에 있는 동료 PD와 작가님, 또 출연자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는 순간들이 모여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프로그램 곳곳에는 연출자로서의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지난 시간에 후회가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답이 없는 상황마다 나타나 기꺼이 함께 수다를 떨어준 김미란 작가와 박재영 PD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 프로그램 관련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이미지입니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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