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의 항아리
Writer_ 이미혜 예술사 저술가
암포라는 고대 그리스에서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담는 데 썼던 길쭉한 항아리다. 양쪽에 손잡이가 있으며 식탁이나 부엌에서 주전자처럼 사용되었다. 토기가 대부분이고 드물게 금속이나 유리로 된 것도 있다. 식탁용 암포라는 솜씨 좋은 장인이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 넣어 아름답게 장식했다. 다양한 그림이 그려진 암포라는 그리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유용한 자료다.
이 암포라에는 두 전사가 싸우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바닥에는 다른 한 사람이 쓰러져 있다. 이것은 「일리아스」의 한 장면으로 그리스 장군 아이아스가 바닥에 쓰러진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빼앗기 위해 트로이 왕자 헥토르와 싸우는 중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이 서사시의 분기점이 된다. 「일리아스」의 시작 부분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마땅히 차지해야 할 아름다운 여자 포로를 사령관 아가멤논이 가로챈 데 분노해 출정을 거부한다. 동료 장군들이 설득에 나서지만, 아킬레우스는 듣지 않는다.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절대 뚫리지 않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전투에 나섰다가 헥토르에게 목숨을 잃는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친구를 보고 아킬레우스는 분연히 일어선다. 그는 헥토르를 죽여 친구의 죽음을 복수한다.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는 패색이 짙어진다.
「일리아스」는 기원전 12세기경 형성되어 구전되다가 기원전 8세기경 문자로 기록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집에서 쓰는 항아리에 「일리아스」의 한 장면을 그려 넣을 정도로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트로이를 문학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도시로만 생각했다. 1871년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라이만은 소아시아 북동부(오늘날의 터키)에서 고대 도시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유적지가 트로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이 도시를 트로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학자들은 「일리아스」가 어떤 하나의 전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살던 종족들이 벌인 각축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암포라에 새겨진 장군들은 「일리아스」 시대보다는 암포라가 제작된 기원전 6세기의 중무장 보병 복장을 하고 있다. 짧은 가운 위에 가슴받이 갑옷, 정강이 받이를 착용했으며 장식이 달린 금속 투구를 쓰고 있다. 손에는 창과 방패를 들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영웅들이 벌이는 결투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아이아스와 헥토르의 대결,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없다면 무슨 재미로 「일리아스」를 읽겠는가. 하지만 기원전 6~5세기가 되면 영웅의 개인적 활약은 빛을 잃는다. 이 시기에 그리스가 지중해 지역을 제패한 것은 밀집대형을 이룬 중무장 보병 덕분이었다.
금속 갑옷으로 몸을 감싼 보병은 일정한 대형을 유지하면서 적의 목이나 갑옷 하단을 창으로 찔러 공격했다. 7킬로그램 정도 되는 방패를 자유자재로 다루어 몸을 보호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 군사들은 둥근 방패를 왼팔에 든든히 끼고 자신의 왼쪽 부분과 옆 사람의 오른쪽 부분을 가려 보호했다. 자신과 옆 사람을 동시에 보호해야 하므로 대형을 유지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기원전 7세기 중엽 등장한 이 혁신적 전투방식은 그리스의 전력을 강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변화를 초래했다. 그 하나는 민주정치의 발전이다. 밀집대형 전투는 귀족 계급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군대를 요구했고 중간 계급을 참여시킬 수밖에 없었다. 군대 규모의 확대는 중간 계급의 정치적 위상을 높아지게 했고, 민주적인 사회가 성립하는 발판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결속력의 강화다. 밀집대형 전투에서는 전열이 허물어지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전방 혹은 측면에서 공격해오는 적에 대응해 대형을 바꾸려면 훈련이 필요했다. 16세에서 20세 사이의 그리스 청년들은 적어도 1~2년간 최초의 훈련을 받았으며 평상시에도 지역 단위로 훈련했다고 생각된다. 공동 훈련은 전투 참여 계층의 결속력을 강화했으며 고전시대 그리스인들의 도덕 관념을 형성했다. 플라톤은 자기 위치를 고수하는 보병의 인내력, 용기 같은 덕목을 세련된 군사기술보다 우위에 놓았다.
[ 출처 : 사학연금지 11+12월호 바로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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