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로의 중심에서 수원 100년의 역사를 잇다
- 여행
- 2021. 2. 1.
신작로의 중심에서
수원 100년의 역사를 잇다
농업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근대문화공간, 수원 구 부국원
나라를 빼앗겨 혼란했던 시기,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일본인의 소유가 된 논과 밭에서 일을 하고 턱없이 부족하게 매겨진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그렇게 생산된 쌀과 농작물들은 수원역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수원 구 부국원은 이러한 악순환의 시발점으로 농업에 필요한 종자와 종묘를 독점판매한 일본인 회사였다. 우리가 가진 것을 수탈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국원은 해방 후 법을 수호하고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과거의 아픔을 치유하고 더 나은 사회로 발돋움하고자 한 우리 민족의 바람이 이곳에 남아있다.
Photo_ 수원시청
일제강점기, 신작로 따라 들어온 농업 수탈의 현장
수원은 1906년 통감부가 우리나라 농업기술 향상과 종자 개량을 목적으로 권업모범장을 설치하면서 근대기 농업행정과 농업연구 중심지로서의 토대를 만들었다. 1905년에는 수원역이 개통됐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순전히 조선식으로 만든 아름다운 수원역사’라 부르며 수원역을 식민지배의 홍보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덕에 1910년대 이후 일본인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수원역 주변으로 수원역과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신작로(新作路)가 들어섰다.
새롭게 형성된 신작로를 따라 동양종묘회사, 식산은행 수원지점, 세무서, 중앙무진회사 등의 경제기구와 관공서가 들어섰고 수원은 식민지적 도시로 근대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향교로로 불리는 신작로의 끝에는 행궁로가 있는데, 과거 수원향교에서 배향을 했던 정조도 이 길을 따라 걸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고 수리시설을 조성하며 새로운 도시를 꿈꿨던 수원은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의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유입로이자 농업 수탈의 통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도시 변화의 중심에는 식민지 경영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특히 일본인 대지주들과 조선인 지주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소작농이었던 탓에 농업 수탈이 수월하게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경제적 이권을 지배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의 농업을 일본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하려던 목적 아래 수원 구 부국원이 설립됐다.
“조선시대 정조가 화성을 축조하고 수리시설을 조성하며 새로운 도시를 꿈꿨던 수원은 일제강점기 이후 농업 수탈의 통로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격변의 시기, 수원 100년의 맥을 이어온 공간
수원 구 부국원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수원의 역사를 함께했다. 1952년부터 1956년에는 수원법원과 검찰 임시청사로 사용되다 1960년까지 수원시 교육지원청으로 사용됐다. 이후 1974년 공화당 경기도당 청사로 사용되다 제5공화국이 출범되면서 폐쇄됐다. 1979년 수원예총으로 쓰이던 건물은 1984년 소유자가 바뀌면서 박내과의원으로 오랫동안 머물렀다. 박내과의원은 개원 후 용하다는 소문으로 환자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그러다 박내과의원이 서울로 이전하면서 2000년대에는 인쇄소인 한솔문화사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이후 오래된 건물들이 대다수 소실되는 상황 속에서도 부국원은 그 자리를 지켰고 2006년 수원시 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되면서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2014년 소유주가 바뀌면서 철거 위기에 처하게 되자 수원시가 협의 끝에 부국원을 매입하게 됐고 근대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등록문화재 제698호로 지정됐다. 2015년부터 3년간의 복원과정을 거친 뒤에는 근대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해 사람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수원향교 방향 골목길에 위치한 부국원은 곳곳에 세월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건립 당시 붉은색의 벽돌로 벽체를 쌓고 타일로 외벽을 마감한 2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내벽에 사용된 붉은 벽돌은 현재의 벽돌보다 크고 ㄱ자형 모서리 타일은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물에서 많이 사용된 형태로 전해진다. 1970년대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구조를 보강하고 건물의 앞뒤로 3층 높이의 박공벽을 세웠으며, 인쇄소가 들어오면서 3층 뒷면에 철문을 내고 외부에는 화물 운반용 승강기를 설치했지만 지금은 뼈대만 남아있다.
“2014년 수원시가 부국원을 매입하고 근대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가치를 인정받아 2017년 등록문화재 제698호로 지정됐다.”
주소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30(교동) |
찾아가는 길 | 향교로에 위치한 수원 구 부국원은 수원역에서 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해 가족여성회관, 이춘택병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하지만 수원역에서 도보로 약 20분 정도면 도착하는 거리이고 가는 길도 험하지 않아 날씨가 좋다면 수원향교 방향 골목길을 따라 걷는 것도 좋다. |
과거의 상처를 이겨내며 수원과 함께 걸어온 부국원의 역사
1층으로 들어가면 ‘신작로 100년의 역사’와 ‘건축으로 보는 부국원’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부국원 건물과 신작로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입구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오래된 철제문이 모습을 보이는데, 시간을 품은 철제문이라고 불리는 이 문은 부국원 복원 당시 발견된 문으로 부국원 좌측면에 있던 부속건물의 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원형을 확인할 때 철제문 말고도 2개의 개구부가 발견됐는데, 후대에 개구부를 막아 철제문만 부속건물의 통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외부에서도 이 철제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부속건물을 찾아볼 수 없지만,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멈춰진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수원 사람들이 보일 것만 같다.
철제문뿐만 아니라 벽면과 조적구조, 원형 줄기초 등 복원 과정에서 발견된 다양한 건축 요소들도 확인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원형 줄기초는 건물의 벽체나 기둥의 무게를 지지하는 연속한 기초를 말하는데 건축 당시 붉은 벽돌로 70~100cm 깊이의 줄기초를 형성한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있다. 또한, 바닥의 원형과 구 부국원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모형도 있어 당시 건물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원 구 부국원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이 남아있는 공간이지만, 한국전쟁을 견뎌내고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에 맞춰 수원 100년의 역사를 함께 이어간 공간이기도 하다. 이제는 근대문화공간이라는 또 다른 쓰임새로 과거의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했던 지역민들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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