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혼불문학관 : 혼불 타오르는 마을에 들어 세상 근심을 잊다
- 여행
- 2022. 3. 2.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발길 닿는 곳마다 이야기가 흐르는 땅, 남원을 여행하려면 이맘때가 좋다. 춘향과 몽룡의 사랑 이야기를 품은 말간 봄기운이 난분분하게 길목마다 낭만을 실어나르기 때문이다. 걷다가 쉬다가 최명희(崔明姬, 1947~1998)의 혼불을 만나거든,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실컷 탄복하면 그만이다.
" 거기다 거북이 등짝처럼 갈라져 금이 간 벽이라니.
그 삭막 황량한 집안에 혼자 앉은 청암부인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내 홀로 내 뼈를 일으키리라’
- 소설 <혼불> 중에서"
인생살이, 살아서도 죽어서도 눈물바람이니!
서도역에서 차로 5분 거리, 마을을 비스듬히 굽어보는 자리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널찍한 잔디마당이 잠시 쉬었다 가라고 청한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면 작가의 목숨과도 같았던 만년필, 원고지와 함께 어록이 보존되어 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입니다. 한 민족의 정체성은 모국어에 달려 있습니다.’
혼불은 우리 몸 안의 불덩어리다. 사람이 제 수명을 다하고 죽을 때 미리 그 몸에서 빠져나간다는 목숨의 불이자 정신의 불이라고 한다. 성실하고 치열하게 한 생애를 다하고 스러진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최명희의 손끝을 통해 세상에 전해졌다. 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전북 남원의 유서 깊은 문중(매안이씨)과 그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거멍굴 사람들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문화를 생생하게 복원한 작품이다.
근대화 물결과 함께 몰락하는 양반과 신분 상승을 꿈꾸는 상인의 갈등을 축으로 양반과 평민, 천민의 세월이 뒤섞여 남원과 전주, 만주를 무대로 부단히 이어진다.
<혼불>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한 최명희는 전북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국어교사로 10년간 교편을 잡았다. 국어교사답게 한글 사랑이 남달랐던 최명희는 “고향 땅의 모국어에 의지하여 문장 하나를 세우고, 그 문장 하나에 의지하여 한 세계를 세워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혼불>은 우리 풍속과 모국어의 보고로 불린다. 최명희는 치밀한 고증을 거쳐 당대의 풍토, 주거, 음식, 복장, 토속언어 등의 민속정보를 원형에 가깝게 형상화했다. 강모와 효원의 혼례, 청암부인의 장례를 통해 당시 호남지방의 관혼상제와 풍속사, 남원지방의 방언도 풍성하게 담았다. 모름지기 근대사의 격랑을 목격한 최명희가 후세에 꼭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심혈을 기울여 썼으리라.
무신노무 인생살이
살아서도 눈물바람,
죽어서 귀신이 되야도
눈물바람, 오나가나 울고
우는 굿이구나.
기양 울어부러라 울어부러.
애껴뒀다 가뭄에 쓸라고 참겄냐?
오짐도 누고 나면 씨언허고
눈물도 쏟고 나면 개볍지,
울고자픈 거 못 울면
체험게. 허기사 머. 울라고 굿허제,
웃을라고 굿헌다냐?
에이고 시언하다.
한참을 참었네 기야.
- 소설 <혼불> 중에서
영상촬영장폐역이 된 후 영상촬영장으로 변모한 구 서도역 역사는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애신과 유진초이가 처음 대면한 장소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역장 관사는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의 하숙집으로 나왔다.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서도길 32
문의 063-620-6165
17년 피땀 어린 미완의 대작
‘그다지 쾌청한 날은 아니었다’로 시작하는 <혼불>은 ‘그 온몸에 눈물이 가득 차오른다’라는 글귀로 끝난다. 1980년 4월 시작한 <혼불>은 1996년 12월 1만2000장으로 끝났다. 17년이라는 긴 시간 집필에만 전념케 한 혼불은 최명희를 죽음으로 몰고 가 결국 유작이 됐다. 마지막 탈고 4개월간은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고 한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최명희가 쉬이 놓지 못했던 고단한 이별이 마을 도처에 서성이고 있는 듯하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처럼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나가는 것’이었다는 최명희의 글쓰기처럼, 우리도 각자의 생을 추슬러 세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마을 곳곳에서 마주한 작가의 혼불이 간곡히 당부하고 있었다.
주소 전북 남원시 사매면 노봉안길 52
문의 063-620-5744~46
휴관 매주 월요일, 매년 1월 1일
[출처 : 사학연금공단 사학연금지 3월호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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