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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피운 사랑, 숨이 막힐 지경이구나!

달빛 아래 피운 사랑,
숨이 막힐 지경이구나!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장돌뱅이의 애틋한 사랑이 진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마을. 봉평은 하늘에 점점이 뜬 구름마저 메밀꽃을 닮았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날, 이효석(1907~1942)의 고향이자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인 봉평을 찾았다. 떠돌이 장돌뱅이의 길 위에 인생이 있고, 생의 계절을 함께 지나온 늙은 나귀가 있고, 바람처럼 날아간 사랑 한 토막이 있다.


모던보이 이효석

가을이면 봉평의 산허리는 메밀꽃으로 덮인다. 올해는 긴 장마 탓에 작황이 부진하긴 해도 은은한 메밀향이 지천을 휘감으며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속삭인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자리한 이효석문화예술촌은 이효석문학관과 효석달빛언덕으로 이뤄져 있다. 문학관은 작가의 문학세계에, 달빛언덕은 체험에 초점을 맞췄다. 메밀밭을 내려다보기 좋은 달빛나귀전망대와 이따금 공연이 열리는 나귀광장도 있다. 예술촌 안으로 들어서면 장돌뱅이의 봇짐을 등에 진 나귀가 지그시 고개를 내민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서 나귀는 허생원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같은 달빛에 젖으며 같이 늙어갔던 나귀는 바로 허생원 자신의 모습이었다.

달빛언덕에는 집 두 채가 있다. ‘이효석 생가’는 작가가 나고 자란 초가집을, ‘푸른집’은 만년에 살던 평양 주택을 재현했다. 꿈꾸는 달 카페에서는 생전 이효석이 즐겨 마셨다는 모카커피를 판다. 향토문학의 대표주자로 불리지만, 사실 이효석은 서양 영화를 즐겨보고 축음기로 쇼팽의 음악을 듣던 모더니스트였다. 아침마다 우유를 마셨고,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커피와 함께 먹었다. 푸른집 거실에 놓인 축음기를 보니, 엄혹한 시대를 살며 한없이 움츠러들었을 젊은 영혼의 고뇌가 읽혀 안쓰럽게 느껴진다.

서구문물에 대한 동경이 커갈수록 이효석의 문학은 토속을 파고든 듯하다. 단편소설 60여 편, 중편 3편, 장편 외에도 시와 희곡, 수필을 80여 편이나 남기고 간 이효석의 감성은 매년 가을 메밀꽃 향기와 함께 새로 피어난다. 2002년 문을 연 이효석문학관은 올해 꼭 20주년을 맞았다. 문학정원에는 책상에 앉은 이효석 동상이 지금도 작품을 집필 중이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가스러진 목뒤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한국 단편문학의 백미 <메밀꽃 필 무렵>

한국을 대표하는 단편소설 작가 이효석은 1928년 빈민의 삶을 다룬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 간 소년은 서른여섯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 타향살이를 했다. 어렸을 땐 백 리나 떨어진 평창읍내 하숙집에서 보통학교를 다녔는데, 봉평 집까지 먼 길을 걸어 다녀오던 경험이 주위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이효석은 결혼하고도 취직이 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은사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들어갔으나 문단 동료들로부터 변절자로 지탄받자 열흘 만에 사직서를 내고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다. 2년 가까이 절필했던 이효석은 모더니즘 문학단체 ‘구인회’에 참여하면서 한때 열렬하게 추종하던 이데올로기를 멀리하고 자연과 사랑을 소재로 한 순수문학의 세계로 접어든다. 1936년 발표한 <메밀꽃 필 무렵>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이 토착적인 자연미와 유려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한국 서정문학의 새 경지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다. 생애 단 한 번이었던 짧은 사랑의 기억을 평생 담고 살아가는 장돌뱅이의 이야기가 애잔하게 마음을 적신다.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지.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나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은은한 메밀향 속 피어나는 서정

“달밤이었으나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 허생원은 평생을 두고 지겹도록 젊은 날의 추억을 회상했다. 늙은 장돌뱅이가 유일하게 마음 뉘일 구석은 달빛 아래 흐드러진 메밀꽃밭에서 피어난 사랑의 기억이었을 터이다. 낮에는 볼품없는 장돌뱅이지만, 달이 뜨면 그 밤의 추억이 되살아나 행복해진다.

한순간의 빛나는 추억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 아득하게 피어오르는 기억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질 땐, 이효석이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칭송했던 달빛 아래 메밀밭에 기대보자. 이효석문화예술촌에선 메밀밭이 어디에 있는지 길을 물을 필요도 없다. 눈을 돌리는 곳이 다 메밀밭이기 때문이다. 젊은 소설가와 늙은 장돌뱅이가 사는 내내 그리워했던 메밀꽃은 매년 새로 피어난다.

“달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 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 이효석문학관 관람안내

 주소  : 강원 평창군 봉평면 효석문학길 73-25

 휴관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다음날),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출처 : 사학연금 11월호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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