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 한라산을 만나다
- 여행
- 2023. 1. 3.
그 겨울, 한라산을 만나다
제주의 상징은 뭐니 뭐니 해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1,950m의 한라산이다. 산이 높아 산꼭대기에 서면 은하수를 잡아당길 수 있다는 뜻이다. 봉우리가 잘려나간 형태의 산을 일컬어 머리가 없는 산이라는 뜻의 두무악(頭無嶽)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잘려나간 봉우리가 날아가 떨어진 곳이 지금의 산방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움푹 파인 봉우리에 빗물이 고여 만들어진 못에는 신선들이 하얀 노루를 타고 놀았다 하여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예쁜 이름이 붙었다.
진정한 겨울왕국, 한라산의 겨울
어느 겨울의 컴컴한 새벽, 한라산 입구에 서서 등산화 끈을 조여 매던 나에게 한라산은 오랜 로망이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다른 산은 몰라도 한라산은 한 번쯤 올라봐야 하지 않겠냐는 원대하고 호기로운 꿈이었다. 한라산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진달래가 피어나는 봄이나 초록이 물감처럼 번지는 여름, 그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에 등산할 맛이 절로 난다는 가을을 모두 제쳐두고 하얀 눈이 산 전체를 뒤덮는 겨울을 꼽는다. 눈꽃이 휘날리는 한라산을 오르고 있노라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눈부신 설경에 힘든 줄도 모르고 산을 오르게 되더란다. 정상에서 마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에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아 다리 아픈 줄도 모르겠더란다. 그들의 그런 호들갑에 마음이 동해서였을까. 평소 등산이라면 손사래를 치던 내가, 겨울 한라산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겁도 없이 말이다.
시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눈이 쌓여 폭신폭신해진 산길은 걷기에 좋았다. 첫 번째 대피소인 속밭 대피소까지는 경사도 완만하여 산책하는 기분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었다. 사라오름을 지나 진달래밭 대피소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겨울 한라산이 절대 만만치 않음을 실감했다.
정오 이전에 진달래밭 대피소를 통과해야 했기에 마음은 바빴고, 바쁜 마음은 무거워진 발걸음을 자꾸만 재촉했다. 다행히 11시 40분경 진달래밭 대피소에 닿았다.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겨울의 선물, 눈 쌓인 백록담
준비해 온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백록담을 향해 다시금 산을 올랐다. 누군가가 진짜 산행은 이제부터라고, 지금까지는 연습한 셈 치면 된다고 겁을 주었는데 과연 그랬다.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까지의 코스는 나와 같은 초보 등산객에게는 어려운 코스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아이젠에 달라붙은 눈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발이 무거워졌고, 마스크 안쪽의 입김이 얼어붙어 호흡을 괴롭혔다. 그러나 나는 그 길 위에서 겨울의 한라산에 오르는 이유를 알았다. 힘들 때마다 고개를 들어보면 반짝이는 상고대 너머 파란 하늘이 눈부신 절경을 만들어냈고, 또다시 지칠 때쯤이면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는 노루를 만나게 해주어 다시금 힘을 낼 수 있게 해주었던 겨울의 한라산. 이런 밀당의 고수와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게 약 두어 시간쯤을 더 올라 오후 1시 30분경, 비로소 백록담에 닿았다. 하얗게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반짝이던 백록담. 내가 백록담을 보게 되다니 눈앞에 두고도 믿기지 않았다. 감탄사 외에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감동에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서 있었다. 일행이 건넨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세상을 다 가진 듯 붕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오늘의 기운으로 어떤 어려운 일도 모두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에 마음이 벅찼다. 다리는 저려왔고 두 볼은 차갑게 얼어붙었지만, 그것마저도 내게는 축복이었다.
그래, 이 맛에 산에 오르는구나. 살면서 언젠가는 이 맛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한라산을 오르는 다섯 가지 방법
총 9.6km / 약 4시간 30분 소요
성판악 탐방안내소 > 속밭 대피소 > 사라오름 입구 > 진달래밭 대피소 > 정상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까지 오를 수 있는 코스. 산 동쪽의 해발 750m 지점에서 출발하며 속밭 대피소와 사라오름,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백록담에 이른다. 관음사 코스에 비해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편이지만 왕복 9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코스로 체력 안배가 중요하다. 진달래밭 대피소부터 정상까지는 상당히 가파른 경사가 이어지므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통제 시간이 지나면 백록담에 오를 수 없으니, 되도록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 여유 있게 백록담에 오를 수 있다.
* 2018년부터 진달래밭 대피소 매점 운영이 중단되었다. 생수나 간식 등은 따로 준비할 것!
총 8.7km / 약 5시간 소요
관음사지구 야영장 > 탐라계곡 > 개미등 > 삼각봉 대피소 > 용진각 계곡 > 정상
성판악 탐방로와 함께 백록담에 오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코스. 한라산 북쪽의 관음사 야영지에서 출발해 개미목과 삼각봉 대피소를 지나 백록담으로 연결된다. 성판악 코스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고 산세가 험해서 등산 초보자들이 오르기에는 부담스러운 코스지만, 하산할 때의 끝내주는 풍경을 보기 위해 성판악 코스로 등산했다가 관음사 코스로 하산하는 사람들도 많다.
총 6.8km / 약 3시간 소요
어리목 탐방안내소 > 사제비동산 > 만세 산 > 윗세오름 > 남벽 분기점
한라산 국립공원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어리목 계곡, 윗세오름 대피소를 지나 남벽 분기점에 이르는 코스로 약 3시간 정도의 비교적 가벼운 코스. 정상까지 오를 수 있는 코스는 아니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한라산의 풍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코스다. 특히 중반 이후에 만나는 백록담 화구벽의 모습이 웅장하다. 하산할 때는 영실코스 또는 돈내코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총 5.8km / 약 2시간 30분 소요
영실 휴게소 > 병풍바위 > 윗세오름 > 남벽 분기점
영실 관리사무소(해발 1,000m)에서 영실 휴게소(해발 1,280m)까지 자동차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보자들이 많이 찾는 코스. 오르기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경사가 급한 영실분화구 능선을 오를 때는 다소 헉헉거릴 정도로 힘들다. 영주10경 중 하나인 영실기암과 병풍바위의 풍경을 바라보며 끝까지 힘을 내보자. 영주10경을 감상하며 영실 탐방로로 등반해 백록담 화구벽을 감상하며 어리목 탐방로로 하산하는 코스를 추천한다. 어리목 코스와 마찬가지로 윗세오름까지만 등반하는 것도 가능하다.
총 7km / 약 3시간 30분 소요
돈내코 탐방안내소 > 평궤 대피소 > 남벽 분기점
서귀포시 돈내코 유원지 상류의 돈내코 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하여 평궤 대피소를 지나 남벽 분기점(해발 1,600m)까지 이어지는 총 7km, 약 3시간 30분 정도의 코스. 남벽 분기점에서 어리목, 영실 코스와 만나므로 올라올 때와는 다른 코스로 하산할 수도 있다. 돈내코 탐방안내소에서부터 평궤 대피소(해발 1,450m)까지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되며 평궤 대피소에서 남벽 분기점까지는 거의 평탄한 지형으로 산책하듯 오르면 된다. 평궤 대피소를 지나 남벽 분기점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한라산 백록담 화구벽을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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