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October

kyung sung NEWS LETTER

하루 끝 어느 저녁에 창경궁 야행

[출처 : 한국중부발전 중부가족 웹진 7월호]

 

눈 깜짝할 사이에 일과가 끝이 났다. 그렇게 마주한 집으로 가는 길. 돌아보니 내가 보낸 시간임에도 그 시간 속에 나는 없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기는 아쉬워 괜스레 저녁 산책에 나서본다. 어둠 속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창경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해 천천히 걸으면서 깨달았다. 이 저녁은 우리의 아름다운 낮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영광의 시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마음껏 누려도 된다는 것을….

글. 임혜경사진. 정우철



저녁, 창경궁에 가는 이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여름은 아쉬운 계절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걷기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 그렇다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걸으며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을 포기할 순 없다. 한낮의 걷기가 두렵다면, 해가 지고 난 후를 걸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장소야 어디든 상관없지만 조금은 특별한 산책길에 오르고 싶다면, 창경궁을 추천한다. 성종 14년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 명의 대비를 모시고자 창건한, 창경궁은 6월부터 8월까지 저녁 6시 30분부터 야간 개방을 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고 있다. 매표만 하고 들어가면 자유로운 관람이 가능하지만, 창경궁 곳곳에 담긴 역사와 스토리를 알고 싶다면 해설 안내를 예약해 문화해설사와 함께 야행에 나서보자. 문화해설사가 창경궁 야행을 도우며 알지 못했던 궁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밤에 창경궁을 거닐다 보면, 문화해설사와 함께 다니는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람객, 외국인 관람객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또 한 가지 색다른 야행법은 바로 한복을 입는 것. 한복이 주는 고유의 아름다움이 궁궐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게다가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는 한복을 입고 궁에 입장하면 관람료가 무료라고 하니, 입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살면서 한복을 입을 때가 손에 꼽을 텐데, 이럴 때 입고 궁에서 사진 한 장 남겨둔다면 더 기억에 남는 야행이 될 것이다. 오늘은 사람들이 입은 걸 구경하는 걸로 대신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궁궐 깊은 곳으로 향했다.


춘당지에서 잠시 쉬어가면
연못을 타고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운치를 더한다.

 

 

춘당지 지나 대온실까지

홍화문, 명정전, 통명전, 춘당지, 대온실이 창경궁의 주된 야간 개방 구역이다. 길이 헷갈릴 수 있으니 미리 개방 구역이 표시된 지도를 살피는 게 좋겠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한 곳이라 작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도 여유롭게 다 돌아보기에는 넓다. 특히 해가 길어진 탓에 창경궁에 어둠이 내려앉고, 불이 하나둘씩 켜지려면 8시는 넘어야 한다. 하지만 개방 시간은 9시까지. 야행을 여유롭게 즐기기에는 촉박한 시간이니 참고하기를 바란다. 다행히 사전에 동선을 잘 파악해 둔 덕분에 헤매지 않고 궁궐을 돌아볼 수 있었다.

홍화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나 있는 나무길을 따라 걸으면 연못, 춘당지가 나온다. 크게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위쪽의 작은 연못이 원래의 춘당지. 백련지, 백련담으로 부른 기록도 있다. 아래쪽 큰 연못은 국왕이 궁궐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의식을 행했던 곳인데, 일본인들이 연못을 만들고, 1986년에 우리 전통 양식에 맞게 재조성했다고 한다. 연못을 타고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이 좋아 나무길에 서서 잠깐 쉬어 본다. 연못에 비친 나무들이 바람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 것 같다.

춘당지를 지나면 창경궁 야행의 백미라고도 불리는 대온실이 나온다.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궁궐 안에 서양식 온실이라니. 이색적인 조합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밤에는 유리 사이로 불빛이 은은하게 비춰 그 매력이 배가되는 것도 사실. 게다가 안에는 다양한 자생 식물을 전시하고 있어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이 지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아픈 우리 역사의 흔적이 담긴 곳이 지금은 이렇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이 씁쓸해서.

 



어둠 속 맑고, 밝게 기억되기를

대온실을 빠져나오니 어둠이 더욱 짙어져 발걸음을 서둘렀다. 아직 봐야 할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경춘전, 환경전, 함인정은 서로 가까워 대온실을 지나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곳의 공통점은 생활공간이라는 것. 통명전과 양화당은 내전의 중심 건물이고, 영춘헌은 정조가 독서를 즐기던 곳, 그 옆의 집복헌은 후궁들이 주로 생활하는 곳이었다.
곳곳에 다양한 이야기가 깃들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를 간직한 곳은 바로 통명전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 사건이 일어난 곳이 바로 여기다. 역사에 대입시켜 돌아보니,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재미가 있었다.

생활공간을 지나면, 창경궁의 인기 공간인 명정전이 나온다.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이라는 위엄 때문인지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았다. 명정전을 지나 명정문을 나오면 창경궁 야행은 마무리된다. 찰나의 야행이 아쉬워 명정문 앞 옥천교에서 엔딩사진을 찍는 것으로 게으름을 피워본다. ‘구슬과 같이 맑은 물이 흘러가는 다리’라는 뜻을 가진 옥천교에서 이곳의 시간을 맑고, 또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어서.

 

 

[출처 : 한국중부발전 중부가족 웹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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