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Octo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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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탄생이 ‘신의 뜻’이었다고?!

[출처 : 방위사업청 청아람 웹진 3+4월호]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세계사에 숱한 파급효과를 낳았다. 경제학자들이 주목한 건 근세적 개념의 은행을 처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을 이끈 템플기사단의 흥망성쇠를 통해 종교·정치·금융이 궤를 같이하며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온 실상을 엿볼 수 있다.

글. 윤진아(문화칼럼니스트)


‘킹덤 오브 헤븐’에서 태동한 금융업

십자군 전쟁은 가톨릭교회의 지원 아래 벌어진 일련의 종교전쟁이다. 여러 십자군 중에서도 성지 십자군이 유명한데, 1095~1291년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아홉 차례의 동방원정을 벌였다. 중세시대 서유럽은 신이 중심이 된 신정사회였고, 성지를 이교도에 빼앗기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톨릭계는 신의 이름을 빌려 “십자군으로 명예롭게 죽은 형제에겐 하늘이 불멸의 구원을 줄 것”이라며 참전을 독려했다. 군중도 “신이 그것을 원하신다(DEUS RO VULT)”며 전쟁을 지지했고, 평민·귀족부터 성직자까지 참전 의지를 드러냈다.

흰 망토와 빨간 십자가로 상징되는 템플기사단(Knight Templar)은 애초 ‘성지 방위’라는 군사적 목적으로 결성됐다. 흥미로운 사실은 템플기사단이 바로 세계 최초의 글로벌 금융기관이자 여수신과 투자금융을 겸하는 상업투자은행이었다는 것이다. 템플기사단은 1128년 교황의 승인을 받아 ‘기사’와 ‘사제’라는 성·속의 신분을 겸하게 됐다. 십자군의 중심축으로서 강력한 무력과 재정, 거기에 ‘신의 대리인’이라는 권위까지 지녔던 템플기사단은 기독교 세계를 수호하는 성스러운 소임으로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유럽 상류층 부자들은 템플기사단에 앞다퉈 재산을 내놓았다. 또한, 기사단원은 아내와 자녀를 두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에 개인 재산도 모두 기사단에 편입됐고, 기사단 자산은 더욱 불어났다.

당시 템플기사단은 유럽과 중동 각지에 1,100여 곳의 지부를 보유했다. 이 글로벌 네트워크와 재정적 기반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이었던 금융서비스를 제공했다. 전쟁 중인 당시 유럽에선 원거리 여정에 현금을 소지하는 게 위험했다. 템플기사단은 십자군의 군자금 대출은 물론, 돈을 맡아 증서를 발급해 주고 이 증서로 필요한 지역에서 돈을 찾아 쓸 수 있게 하는 서비스, 즉 예금 입출금 서비스를 제공했다. 송금 이용자들은 현금 대신 양피지(양가죽을 얇게 늘린 것)로 만든 어음을 들고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지순례자와 일반 상인들도 이 송금체제를 이용했다. 심지어 무슬림도 템플기사단의 금융서비스를 이용했다고 한다. 다국적 은행을 겸한 금융업을 통해 템플기사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연간 수입이 무려 60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 왕실 수입이 3만 파운드에 불과했다고 하니, 그 규모와 권세를 짐작할 만하다.

 

글로벌 투자은행의 시초, 템플기사단

십자군 전쟁이 여러 차례 진행되는 동안 템플기사단의 사업은 번창했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거나 어음 거래 등의 금융투자업까지 펼쳐 수익을 키워나갔고, 각국 왕실에도 자금을 빌려줬다. 나아가 유럽 및 중동 각지에 9,000여 곳에 이르는 영지와 부동산을 소유하는 등 글로벌 투자은행의 모습까지 갖추게 되었다. 유럽 최대 금융기관이 된 템플기사단은 지중해 세계의 국제송금 업무도 취급했다. 서유럽과 동방에서 여행자 수표도 발행했고, 환전 수수료도 챙겼으며, 대부업에도 진출했다. 런던에서 예루살렘까지 수천 개의 성채와 자체 군사력을 보유한 템플기사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금자 허락 없이는 누구에게도 돈을 인출해주지 않는다’는 원칙도 거대 금융기관으로의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적에게 붙잡혔을 때, 보석금 마련을 위해 왕의 예탁금 환급을 요구한 신하들의 요청도 거절했다고 한다. 이 같은 원칙은 오늘날 고객 당사자 외에는 돈을 인출할 수 없게 한 글로벌 투자은행 내규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거대 금융기관으로의 발달, 독이 든 성배였나

기세등등했던 템플기사단의 몰락은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적인 금융업에서 비롯됐다. 13세기 말엽 십자군 전쟁에서 이슬람 세력이 우세를 잡으면서 템플기사단의 존립 기반이 위협받게 되었다. 결국 1307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악마를 숭배하는 단체’라며 기사단 2,000여 명을 체포했고, 기사단 소유 재산과 부동산을 압류했다. 이 배경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템플기사단에 많은 채무가 있었던 필리프 4세가 기사단 해체를 통해 빚을 해결하고자 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갑작스럽게 와해된 템플기사단은 훗날 수많은 이야기의 모티프를 제공했다.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처럼 음모론의 주인공부터 ‘파이브 스타 스토리’ 같은 SF 만화에선 비밀을 지닌 무력집단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신의 응징이었을까. 무력 위에 세워진 역사상 최초의 은행은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템플기사단에서 시작된 금융업은 근대로 넘어와 자본주의와 결합하며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만들었다. 수도자이자 군인이었고 참회자이자 약탈자였던 템플기사단은 여러 전설을 낳았고, 지금도 게임·영화·소설 등으로 끊임없이 부활하며 ‘전쟁 속 경제학’을 일깨우고 있다.

 

 

 

 

[출처 : 방위사업청 청아람 웹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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