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Nov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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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는데도 자격증이 필요해?

술 마시는데도 자격증이 필요해?

글. 이예슬 기자(뉴시스 경제·부동산부)


십수 년간 난 여행 집착증 환자였다. 다음에 갈 여행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증이 도졌고, 앞으로의 여행을 손꼽으며 몇 달을 버텼다. 약발이 떨어지면 또 다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광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가진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 ‘거긴 어떤 술이 유명한가’, ‘술값은 저렴한가’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와인을 마시러, 중국 칭다오에 위엔장 맥주를 마시러, 태국 치앙마이에 쌩쏨을 마시러, 스페인 그라나다에 공짜 타파스를 먹으러, 통영에 다찌집을 경험하러 떠났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발이 묶였다.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하나 헛헛해졌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이 와인 배우기였다. 나의 코로나 이전 마지막 해외여행은 이탈리아였다. 술을 즐기고 와인을 좋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지만 막상 와인의 고장에 술을 마시겠다는 목적으로 왔는데 어떤 와인을 골라야 잘 골랐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이 됐다. 지식은 일천했고 내 눈앞에 놓인 와인 리스트는 너무 방대했다. 와인 맛은 좋았지만 말과 글로 십수 년간 난 여행 집착증 환자였다. 다음에 갈 여행지가 정해지지 않으면 불안증이 도졌고, 앞으로의 여행을 손꼽으며 몇 달을 버텼다. 약발이 떨어지면 또 다음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광적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가진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 ‘거긴 어떤 술이 유명한가’, ‘술값은 저렴한가’ 같은 것들이다.할 방법이 없어서 말이 제대로 안 트인 아이처럼 옹알이를 해대는 느낌이었다.

취미를 전문가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유행이란다.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촉수를 뻗어놓고 이거 조금 저거 조금 건드려 시도해 보다가 ‘장비빨’을 잔뜩 세운 뒤 시들해져 버리고 말았지만 자칭, 타칭 술쟁이인 내가 술에 있어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술도 취미냐고 한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러면 어떠랴. 이렇게 생겨 먹은 사람이 나인 것을, 이미 한 우물을 파기로 한 것을. 그다음 ‘음주를 위해 돈과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자격증을 따는 것이 과연 유의미한 활동일까? 그 돈과 노력으로 술을 더 사 마셔서 경험치를 늘리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거친 후 나는 WSET(Wine&Spirit Education Trust)취득 과정에 등록했다. 일종의 국제공인 소믈리에 교육 프로그램이다.

“WSET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호주, 뉴질랜드, 중국, 홍콩, 일본 등 전 세계 70여 개 주요 국가에서 권위와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국제 와인 전문 교육 및 전문가 인증기관입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자격증 소지자의 와인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며, 와인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대체불가한 필수자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강의를 들은 교육기관에서 WSET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단순한 이론교육뿐 아니라 테이스팅 훈련도 병행하기에 와인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쯩’을 딸 수 있다는 점은 성취감과 도전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전에도 취미과정으로 와인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레벨1을 건너뛰고 중급과정인 레벨2부터 시작했는데, 기본적으로 와인에 대한 애정이 크고 여러 종류를 두루 마셔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레벨2부터 시작해도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

레벨2의 시험은 한국식 입시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사지선다의 객관식 문항 50문제다. 패스의 커트라인이 55%기 때문에 절반 정도만 맞춰도 자격증은 얻을 수 있지만 70점 이상 따 ‘PASS WITH MERIT’을 받느냐 86점 이상으로 ‘PASS WITH DISTINCTION’을 받느냐의 문제다. 레벨2는 취미반 정도의 난이도이기 때문에 수업 직후 틈틈이 복습을 하고, 시험 직전 일주일 정도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더니 PASS WITH DISTINCTION으로 통과해 최우수 합격자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의 배지를 받을 수 있었다.

 

WSET2를 86점 이상으로 통과하면 증명서와 함께 배지를 얻을 수 있다.

시험을 패스하고 나니 와인에 대한 열정이 더 강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레벨3 강의를 듣는 중이다. 레벨2를 어렵지 않게 통과하고 난 후 자신감이 붙었건만 레벨3는 낭만적으로 접근할 게 아니다. 객관식 시험은 물론 주관식 서술문제와 블라인드 테이스팅까지 포함된다. 교과서는 최소 54시간 이상의 공부를 하라고 제안하고 있고, 일주일에 한 번 수업을 듣고는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다음 수업을 듣기 전 적어도 반나절을 할애해 복습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렇게 해도 통과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레벨3까지만 국내에서 취득할 수 있고, 최종 등급인 디플로마 과정은 영국 본원이나 홍콩에서 딸 수 있는데, 한국인 중에는 디플로마를 취득한 이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레벨2는 약 90만 원, 레벨3는 약 180만 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지라 결코 만만히 볼 금액은 아니다. 게다가 각자 생업이 있는데 퇴근 후의 시간을 빼 수업을 듣고 시험공부를 하는 것도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와인업계에 있지 않은 단순한 애호가가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 WSET 자격증을 딸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예스’다. 개인적으로 와인을 많이 마셔봤더라도 해당 와인의 특징을 숙지하고 접하는 것과 그냥 마시는 것의 간극이 매우 크다고 체감했기 때문이다. 강의를 할 때 2시간가량 이론수업을 한 후 나머지 1시간 동안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는데, 방금 습득한 정보를 토대로 추론해 와인의 향과 맛을 느끼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뇌리에 강렬하고 오래 남는다. 시음 측면에서도 혀에서 느껴지는 맛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게 만족스럽다.

혹자는 그 돈으로 차라리 여러 와인을 접해보면 되지 않냐고도 한다. 하지만 수업 1회당 5~6가지의 와인을 맛볼 수 있는데, 이를 직접 내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면 수업료가 결코 비싼 가격이 아니다. 그리고 와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사람이 여럿 모여야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와인을 딸 수 있을 테니 여러 종류의 와인을 동시에 놓고 비교 시음할 수 있는 기회가 그리 많지도 않다.

WSET3 이탈리아 북부/중부 시간에 시음한 와인들.
수업이 끝나면 반나절 정도 시간을 들여 복습한다.
수업은 2시간의 이론 수업과 1시간의 시음 수업으로 나뉜다.

WSET3를 취득한다고 해도 내가 와인업계에서 일하거나 이 소박한 지식으로 돈을 벌 일은 아마 희박할 것이다. 다만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고 해서 퇴근 후의 시간에 멍하니 영상물을 틀어놓고 술만 마시기엔 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말이다. 머리도 쓸수록 좋아진다고 하는데, 100년 사는 동안 꾸준히 ‘인생대유잼’으로 살려면 새로운 지식으로 뇌를 콕콕 자극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는 만큼 보이니까 많이 알면 와인이 더 맛있지 않을까?

친구들과 몇 년 전부터 40살이 된 기념으로 프랑스 여행을 가자고 계를 하고 있다. 실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햇살이 좋은 초여름 포도가 향기롭게 익어가는 와이너리를 산책하고 그곳에서 빚은 와인을 시음하며 장기간 숙성이 가능한 좋은 와인 한 병을 사다가 오래도록 셀러에 보관해 뒀다가 환갑이 되면 여행 멤버들과 오픈하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꾸준히 와인을 공부해서 미래의 프랑스 여행에서는 와인 맛을 예전보다 더 적확하게 기억하고 기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역마살 낀 술쟁이는 설렌다.

자격증 취득의 목표를 낮게 잡아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취향을 파악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활동이란 게 내 판단이다. 최근엔 코로나19로 모임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지만, 와인이라는 동일한 취미를 가진 이들을 교육기관에서 만나 스터디를 꾸리고 꾸준히 교류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본다.

또 기본기를 탄탄히 다지면 혼탁한 와인업계의 마케팅에 ‘눈탱이’를 맞지 않을 수 있다. 몇 달 전 우리 엄마는 따로 사는 딸을 위해 한 상 가득 산해진미를 차려놓고는 와인 좋아하는 딸을 준다며 와인 한 병을 사놨다. “원래 7만 원 짜리라는데 이번 주까지만 9900원에 판다지 뭐야. 이거 좋은 와인 맞지?” 하며 눈을 반짝이는 엄마에게 나는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 와인은 언제 사도 9900원이라고, 그냥 알코올 보충용 저가 와인을 퀄리티 와인이라고 속인 마케팅 수법에 엄마가 당한 거라고. 우리 엄마가 아니라도 한 번쯤은 와인 매대에서 정가를 쭉쭉 그어놓고 저렴하게 할인 판매하는 와인에 낚여본 슬픈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명절 선물로 들어온 와인 라벨에 ‘보르도’라고는 적혀있는데, 아무리 검색을 해봐도 관련 정보를 찾지 못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알 수가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런 와인의 경우 선물한 사람도 해당 와인이 낮은 품질의 저가 와인이라는 점을 모르고 비싸게 결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요즘은 ‘비비노’ 나 ‘와인서쳐’ 같은 와인 검색 플랫폼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와인을, 특히 상품성이 떨어지는 와인까지 다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와인 자격증을 딴다고 해서 누구나 유명 소믈리에급의 실력을 갖추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라벨을 읽는 방법은 습득해 굳이 마실 필요가 없는 와인에 돈을 쓸 확률은 줄일 수 있다.

 

[출처 : 감정평가 웹진 봄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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