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그림에 풍미를 더하는 천연 조미료
- 문화
- 2023. 1. 6.
달빛,
그림에 풍미를 더하는 천연 조미료
미술사의 창공에는 수많은 달이 떠 있다. 달이 함께하는 풍경은 동서양의 그림을 보는 방식이나 재료의 차이만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달밤이 주는 시적(詩的) 정취와 사색적인 면에서는 비슷한 느낌을 공유한다. 달은 풍경을 은은하게 비추면서 분위기를 숙성시킨다. 달은 평등하다. 아파트 단지에도 뜨고 후미진 골목에도 뜬다. 바닷가에도 뜨고 산속 계곡에도 뜬다.
초승달이 켜진 바닷가 풍경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년경)로 유명한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그는 배가 있는 해변 풍경을 즐겨 그렸다. 해변의 시간대도 다양했다. 1815년경에는 「아침」, 「점심」, 「저녁」, 「밤 」 연작을 그릴 만큼 해변 풍경은 프리드리히 작품세계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해변 풍경 중에서도 가장 빈번한 광경은 저녁이나 밤의 이미지였다.
1818년에 그린 「해변의 풍경」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시선을 압도한다. 해안가에 초라한 몰골의 말뚝과 그물이 설치되어 있고, 바다에는 닻을 내린 배 한 척과 귀항하는 배들이 줄지어 떠 있다. 낮게 걸린 수평선 위의 넓은 하늘에는 초승달이 엷게 빛난다. 고요한 광경이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마저 잠이 든, 적막하기 그지없는 세계다.
앞쪽의 말뚝과 그물은 바닷가에 서있는 사람들의 뒷모습 같다. 말뚝의 앙상한 몰골이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깡마른 인체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세파를 겪은 사람의 평온한 자태다. 부푼 꿈을 싣고 인생의 거친 바다를 항해했지만 남은 것이라고는 무일푼의 몸뚱이뿐이다. 말뚝과 그물에 남루한 생이 겹쳐진다.
프리드리히는 중경(中景)이 생략된 특유의 구도로 사색적인 분위기를 돋운다. 이 그림에도 중경이 빠졌다.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의 극적인 구성에 장엄한 분위기가 고조된다. 근경의 말뚝과 그물은 시점을 낮게 잡아서 부각시키고, 바다는 넓게 펼쳐진 해안가 저편에 두었다. 그래서 근경의 크고 작은 말뚝과 그물에 더 눈이 간다. 그림에 적막의 수위를 높이는 것은 초승달이다. 달은 밤하늘에서 작품의 균형을 잡아주며 엷게 빛난다. 둥근 달이 아니라 초승달이다. 하늘의 구름을 물들이는 초승달마저 없다면, 바닷가는 불 꺼진 운동장처럼 암흑이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생의 어깨를 어루만지듯이 비치는 달빛 덕분에 여윈 삶은 위로를 받는다. 달빛은 배를 밝히고 해안가를 비춘다. 초승달은 희망의 상징이다. 어두운 밤바다의 등대다. 세계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은 인생을 상징한다. 배들이 초승달을 네비게이션 삼아 귀항하는 중이다. 배가 닻을 내리고 머물 수 있는 정박지는 배들의 최종 목적지이자 최후의 안식처이다. 수수한 색채와 낮은 수평선이 고요한 명상의 공간을 선사한다.
보름달이 비치는 산속 풍경
프리드리히가 바닷가의 달을 그렸다면, 조선시대 후기의 화원(畵員)화가 남리(南里) 김두량(金斗樑, 1696~1763)은 산속의 달을 그렸다. 늦가을 밤, 깊은 산속의 급류가 세차다. 근경에 두 그루의 고목이 장승처럼 서있고, 건너편에는 나무들이 안개에 싸여 있다. 하늘은 둥근 달을 품었다. 스산하면서도 괴괴한 풍경이다. 고목의 자태와 안개, 그리고 세찬 물소리에 적막감이 고조된다.
김두량은 북경에서 유입된 태서법(泰西法, 서양화법)을 도입하여 소재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대표작인 긁는 개(「흑구소고(黑狗搔股)」)나 짓는 개(「삽살개(尨犬)」)의 실감나는 묘사와 섬세한 표현은 태서법의 영향이다. 영조의 화제(畵題)로 유명한 「삽살개」를 제작한 이듬해에 그린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1744)에도 태서법의 흔적이 있다. 전경과 원경으로 연출한 원근의 표현이 그것이다. 그림에 스산한 분위기를 강화하는 것은 안개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의 표현도 한 몫 한다. 김두량은 게의 발톱 같은 ‘해조묘(蟹爪描)’를 구사하여, 잎 떨군 고목에 연륜을 더했다.
여기서 보름달은 ‘분위기 메이커’다. 달을 가리고 보면 산속의 풍경은 암전된 것처럼 싱거워진다. 무심한 듯 야무진 보름달 때문에 계곡의 시각이 한밤임을 알 수 있고, 물소리와 더불어 괴괴한 산속 분위기가 오롯이 살아난다. 그런데 김두량은 달을 그리지 않았다. 달 주변을 둥글게 칠해서 달은 드러냈다. 달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을 그리는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을 사용한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풍경」의 초승달은 직접 채색해서 그렸다. 또 이 그림에서는 해변에 비친 달빛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지만 「월야산수도」에서는 나무에 비친 달빛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감상자가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달은 영원한 분위기 메이커
「해변의 풍경」과 「월야산수도」는 대조적이면서도 서로 통한다. 바닷가 풍경과 산속 풍경이어서 대조적이지만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달밤이라는 점, 고요하고 적막한 분위기로 사색을 이끈다는 점에서 두 그림은 닮았다. 또 「월야산수도」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마음의 풍경을 그린 관념산수인데, 「해변의 풍경」도 그러하다. 일부 실경에서 소재를 빌었을 수도 있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풍경으로 발효되었다는 점에서 「해변의 풍경」도 관념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프리드리히는 “외부 세계로부터 보이는 것은 대략적으로 추출해 받아들인 것일 뿐, 나머지는 모두 상상력에 의존해야 한다.”고 했다.
두 그림은 달 때문에 깊어졌다. 달이 없으면 그림에 화색(和色)이 돌지 않는다. 달에 힘입어 분위기가 살았고, 달에 의해 적요하면서도 명상적인 그림이 되었다. 달은 두 그림의 영원한 광원(光源)이요, 감상에 풍미를 높여주는 천연 조미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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