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 리얼리티의 50가지 그림자
- 문화
- 2024. 10. 23.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이진송 작가
팟캐스터, 현대문학 연구자독립출판물 <계간홀로>,
저서 <연애하지 않을 자유>, <차녀힙합>, <아니 근데, 그게 맞아?> 출간
팟캐스트 <밀림의 왕> 제작
팟캐스트 <밀림의 왕> 제작최근 10년 사이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줄여서 ‘연프’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로맨스는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소재이고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의 연애사에 이러쿵저러쿵하는 것 또한 인류의 고전적인 취미니, ‘남의 연애’를 샅샅이 들여다보고 말 얹을 수 있는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인기는 필연적인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연프의 유행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어떤 욕망을 겨냥할까?
변주의 향연, 연예 프로그램 변천사
태초에 <사랑의 스튜디오>(MBC)가 있었다. 1994년부터 2001년까지 방영했는데, 말쑥하게 차려입은 출연자들이 스튜디오에 출연하여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사랑의 화살표를 쏘았다. 이후 <목표달성 토요일>의 꼭지인 <애정만세>(MBC), <산장미팅-장미의 전쟁>(KBS), <리얼로망스 연애편지>(SBS) 등이 연예인과 비연예인, 혹은 연예인끼리의 구애를 예능으로 연출하며 계보를 이어갔다.
대중의 관심을 끄는 연예인과 로맨스의 핑크빛 환상이 필수였던 연프계에, 어느 날 사탄들의 학교에 등장한 루시퍼만큼이나 이질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짝>(SBS)이다. 기존의 연프에 등장하는 일반인들이 연예인 지망생이라 외모가 출중하고 방송을 의식했던 것과 달리, <짝>의 출연진은 신청을 받아서 카메라 앞에 선 ‘진짜 일반인’이었다.
이들은 남자 1호, 여자 1호처럼 익명으로 처리되고 똑같은 옷을 입은 채 구애에 나선다. 이쯤부터 유명세보다는 짝을 찾는 것이 목적인 ‘진정성’이 일반인 출연자의 중요한 덕목이 되었다. <짝>에는 분위기가 가라앉을 만하면 앞에 나서서 목청이 터져라 “러브러브!”를 외치는 강호동도 없고, 스타일리스트도 없고, 핑크빛 세트도 없다. 있던 것이 없는 대신, 없던 것이 있었다. 폐쇄된 공간에서 합숙하면 출연자의 다양한 감정과 갈등이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미화와 편집 없는 ‘날것’의 정념은 당연하게도 지질하고 남루하다. 설레기는커녕 뜨악한 지경이라 연프와는 걸맞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형식의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짝>은 SBS에서 ‘시사‧교양’으로 분류한, 생태계 교란종. 구애의 아수라장 위로, 출연자들의 행동을 중계하는 잔잔한 내레이션이 깔린다. 여자의 등장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남자의 눈빛, 기회를 노리며 분주히 움직이는 몸짓, 매력적인 이성을 둘러싼 경쟁 구도를 묘사하는 내레이션은 누가 봐도 <동물의 왕국>의 문법이다. <짝>은 연애의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속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충격을 제공했다. 설렘 없는 연프도 연프인가? 철학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연프에서 ‘합숙’과 ‘관찰’이라는 요소를 도입한 <짝>이 녹화 중 출연자 사망이라는 사건으로 종영한 후, 2017년 <하트 시그널>(채널A)이 연애와 추리를 결합한 포맷으로 연프의 부활을 쏘아 올렸다. 아름다운 청춘남녀가 근사한 집에서 함께 살며, 협찬 된 제품을 소비하는 그림은 로맨스의 환상을 충족한다. 영상을 함께 보는 패널의 존재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추리하고 감정적으로 몰입하면서 출연자와 시청자를 대리한다. 이렇게 연애와 추리가 결합한 형식은 상대의 목적이 돈인지 사랑인지 알아내야 하는 <러브캐처>(TVING), 비밀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은 허용되는 <비밀남녀>(KBS Joy), <핑크라이>(디즈니 플러스), 헤어진 연인들이 출연하지만 누가 누구의 X인지는 비밀에 부쳐지는 <환승연애>(TVING), 남매끼리 출연해서 가족 관계를 숨기는 <연애남매>(JTBC), 좋아하는 대상이 다가오면 알람이 울리기에 거리를 확보해야 하는 <좋아하면 울리는 짝짝짝>(웨이브)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된다. 애초에 연애가 어떤 단계 전까지는 모호한 상대의 감정을 추측하고, 미래의 불확실한 관계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속성을 고려한다면 연애와 추리의 결합은 제법 잘 어울린다.
관계성을 건드는 다양한 시도
평범한 연프로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인지, 이제 연프는 다양한 요소를 추가하면서 차별화를 꾀한다. <환승연애>가 대표주자인 ‘헤어진 이후’ 혹은 ‘위기의 연인’을 다루는 연프는 <우리 이혼했어요>(TV조선), <돌싱글즈>(MBN), <체인지 데이즈>(카카오TV), <이별도 리콜이 되나요?>(KBS2)가 있다. 낯선 두 사람이 만나 연애에 ‘골인’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연애 그 이후의 ‘관계’가 문제시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돌싱’의 등장은 낭만적 사랑의 최종 관문처럼 보였던 ‘결혼’조차 더는 완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관계의 유동성, 그로 인한 현대인의 불안이 전면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연애를 통해 자아를 성찰하고, 관계 맺는 방식을 사유하는 측면이 두드러진다. 낭만적 사랑은 현대인에게 누구와도 같지 않은 ‘고유한 나’를 만들어 가는 서사이다. ‘내’가 변화하는 존재이듯, ‘내’가 속해 있는 사랑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실수하기도 하고, 이미 끝난 관계는 어찌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기도 한다. 이별과 재회를 다루는 연프는 관계의 시작만큼이나 관계의 마무리, 그리고 그 관계의 중심에 있는 ‘내’가 중요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다시, 첫사랑>(MBC에브리원), <각자의 본능대로>(tvN), <솔로 동창회 학연>(MBC), <나대지마 심장아>(채널 S, K-star), <내 사람친구의 연애>(Mnet)는 첫사랑이나 친구, 동창끼리 출연하며, 이들의 관계성이 연애로 인해 어떻게 변화하는지가 관건이다. 이러한 형식은 연애가 그 어떤 관계보다 우위를 점한 세태를 잘 보여준다. ‘남사친’, ‘여사친’으로 불리는 이성 간의 우정은 언제든 연애로 바뀔 수 있는 가능태로 인식되고, 우정은 연애라는 변수 앞에 맥없이 무너지곤 한다. 한편 출연자의 정체성이 특징인 경우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신선함을 넘어 사회문화적 변화를 반영한다. 전통적으로 배척의 대상이었던 점술사들이 출연해서 운명과 연애 사이에서 갈등하는 <신들린 연애>(SBS), 동성애자 남성이 출연하여 이성애중심주의 연애 각본에 균열을 내는 <남의 연애>(웨이브), 중장년층이 출연해서 100세 시대에 연애가 2030 ‘청춘’의 전유물이 아님을 선포하는 <끝사랑>(JTBC)은 연애라는 관념이 어떻게 변화하고 확장하는지 반영한다. 그런가 하면 노골적으로 연애와 결혼이 ‘욕망’의 영역임을 선언하며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하는 연프도 있다. <솔로지옥>(넷플릭스), <에덴>(IHQ) 같은 프로그램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소리치는 아이처럼, 결국 외모가 제일 중요하지 않으냐고 소리 지른다. <커플팰리스>(Mnet)는 ‘초고속 결혼’을 목표로 한다는 소개처럼, 아예 자산과 결혼 요구 조건을 모두 공개하고 트레인에 올라 선택을 받는다. 결혼정보회사의 매니저가 아예 패널로 출연한다. 조건보다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근대적 결혼관을 대놓고 흔들며 ‘내 안에 있는 속물근성’을 만족시켜 주겠다는 이 난리 블루스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이 과정은 ‘남자는 조건, 여자는 외모’라는 낡은 도식을 강화하는데,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오롯한 진실이리라.
‘진짜’를 원하는 시청자
연프의 전성기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는 연애가 점점 힘들어진다. 저성장 시대에 자기 계발과 기회비용의 투입을 요구하는 연애는 ‘가성비 나쁜’ 행위이다. 이별 살인이 하루가 멀다고 뉴스를 타는 상황에서 연애는 생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현실의 연애가 불가능하기에 안전하게 판타지를 충족하고, 설렘과 같은 감정을 대리 체험할 수 있는 연프가 인기를 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는 소중히 여길 ‘진짜’를 원한다. 일상적인 연출과 ‘주작’의 위험이 판치는 현실에서 진정성을 향한 갈망이 연프에 출연한 일반인에게도 적용된다. 유명세가 목적인 듯 보이거나 구애에 적극적이지 않으면 지탄받는다. 진정성의 왕관을 쓴 출연자는, ‘국민 커플’로 등극하여 고척돔에서 결혼식을 올리라는 ‘주접’의 대상이 된다. 프로그램 외적인 측면에서는 시청 공동체의 경험이 연프의 인기를 담당한다. 관계는 누구나 경험하는 것이기에, 연프의 시청 공동체는 쉽게 공감하고 의견을 제시하며 끈끈해진다는 특징이 있다.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에도 손쉽게 접근 가능한 출연자의 일상은 몰입을 현실의 영역까지 연결한다.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연프는 시청자의 욕망이나 시대정신과 치열하게 상호작용하며 변신하는 중이다. 배제당했던 존재들의 연애가 가시화되거나, 연애를 둘러싼 다양한 감정과 성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앞으로도 이상하고 낯선 연프와 존재들을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연프의 젠더 재현이나, 일반인 출연자 보호 같은 사안을 비판적으로 감상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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