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November

kyung sung NEWS LETTER

꼰대 PD의 넋두리: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 그리고 사랑···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김정우 비주얼미디어 제작이사

KBS Joy <연애의 참견>, IHQ <언니가 쏜다!>
SBS Plus <밥은 먹고 다니냐?>
KBS <하룻밤만 재워줘>
채널A <애로부부>, <잘살아보세>, <젠틀맨>, <아빠는 꽃중년>
TV조선 <여배우의 사생활>


“사랑이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요즘 세대들은 이 대사를 잘 모를 것이다. 1970년에 개봉한 사랑의 대명사인 영화,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의 대사다. 프란시스 레이의 슬프고 감성적인 멜로디와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이 최고의 반전인 그 시대의 눈물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낭만이 더 이상 낭만이 아닌 시대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갈무리



그 시대에 우리는 토요일 저녁이면 가족이 둘러앉아 같이 보던 주말의 명화와 함께 소년기와 사춘기를 보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개념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이미 사랑은 그렇게 고귀하고 감동적이고 함부로 말하면 안 되는 내 마음속의 보물 상자 같은 것이었다. 그냥 길을 걷다가 피식피식 웃게 되고 갑자기 가슴이 떨려오는···.
로버트 테일러, 비비안 리의 <애수>,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의 <로마의 휴일>. 이런 흑백영화들로 우린 어려서부터 사랑은 무조건 희생이란 걸 배웠다. 그래서 사랑도 그렇게 했다. 아프고 힘들어야 그게 진실된 사랑인 줄 알고···.
엔니오 모리꼬네의 너무나 감성적인 멜로디가 담긴 <시네마 천국>에서 토토가 여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몇 날 며칠을 그녀의 집 앞에서 희미한 불빛의 창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추위와 빗속에서 기다리던 것을 우린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고, 그래서 사랑했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아름답게···.

만약 요즘 그렇게 행동한다면 아마도 집착이나 스토커로 경찰에 신고당할 게 뻔하다. 얼마나 가슴 아프고 슬픈 현실인가.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과하면 잡혀가는 시대!!! 그 전에 이 세대와 시대를 이렇게 만든 것에 여러 영상매체의 책임도 분명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온갖 폭력성과 치정극과 반전의 독함으로 몰아가는 영상매체가 분명 인간들의 잔인함을 부추기는 데 가장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연애도 영상을 통한 대리만족으로
한국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한 명대사가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최근 영화는 아니지만 요즘 세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시간과 세월이 흘러서 다른 건 다 변해도 사랑은 변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현재 우리는 연애가 힘든 시대, 낭만이 없는 시대, 사랑을 하면서도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시대에 살고 있다. 예전에는 연애를 책으로 배웠다면 요즘은 연애를 영상으로 배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상을 통한 간접연애가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시대가 되었다. 매체에서 소개되는 사랑은 더 이상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리 애달프고 가슴 절절한 사랑 이야기라도 극적인 반전이 없거나 예상을 뛰어넘는 호러적인 부분이 없으면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이러한 선상에서 소프트한 반전을 담은 백 퍼센트 리얼 연애를 강점으로 내세워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시청자들은 현실 속 내가 하지 못하는 연애의 대리만족으로 연애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매혹되고, 중독된다.
어떤 연애 프로그램에선 월등한 비주얼에 스펙까지 갖춘 완벽 남녀들이 나와서 드라마를 보듯 철저히 시청자로서 몰입해 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연애 프로그램에선 나와 비슷한, 때론 나보다 못해 보이는 처량 남녀들이 나와서 마치 내 일인 양 빙의해서 즐기기도 한다.
나의 부족한 연애와 사랑을 타인의 연애를 보면서 간접적으로 만족하며 빠져드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큰 위안과 희망을 얻는다!!! 나보다 못해 보여도 저렇게 용기 내서 사랑을 고백하고 연애하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참 슬프고도 웃긴 일이지 않은가.



연애가 어려운 현실 속 판타지
<연애의 참견>부터 <애로부부>, <다시 첫사랑>, 그리고 이번에 론칭한 <여배우의 사생활>까지 남녀 간의 연애와 애증, 사랑을 다룬 프로그램을 연이어 계속해 왔다.
제작 PD 입장에서 연애 리얼 프로그램의 장점은 재미와 반전을 다 챙길 수 있다는 점이다. 프로그램 포맷이 가지는 ‘남의 연애’에 대한 대리만족과 위안이 있고, 프로그램 출연자 대부분이 일반인이다 보니 그로 인한 강점도 있다. 여타 드라마처럼 A급 스타가 제작비를 좌지우지하지 않아서 예능 프로그램의 다양성과 퀄리티를 높일 수 있다. 그리고 타 방송에 노출되지 않은 그야말로 새로운 인물이다 보니 그로 인한 신선함도 큰 매력이다. 이들은 솔직하게 거침없이 연애에 직진한다. 제작진 입장에서 캐릭터를 구축하거나 감정을 흐름을 따라가기 용이하다. 연예인 출연자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까지 빌드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 일반인 출연자들은 감정을 거침없이 발산해 결과가 빠르다. 한 회만 봐도 출연자의 마음이 어떤 상대에게 가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빠른 속도와 전개는 드라마도 영화도 정속보다는 축약본 또는 쇼츠로 소비하는 요즘 세대들의 속도와도 부합한다.

물론 연애 리얼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서 어려움도 많다. 출연자가 연예인인지 일반인인지 무관하게 프로그램 주제가 연애이고 리얼 상황인 만큼 돌발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제작진이 촬영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들을 충분히 예상하고 준비하여 촬영에 임하지만, 때로는 그 범주를 벗어난다. 돌발행동이 이뤄지거나 미묘한 감정이 표현되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 갈 경우 제작진이 감당해야 할 정신노동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출연자 캐릭터가 제작진이 파악한 것과 다른 경우도 있다. 며칠간 24시간 함께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인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나는데, 사전미팅때 보여준 이미지와 너무 다를 경우 제작진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판을 다 갈아엎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물론 최악의 경우 프로그램 중단 위기도 가정하고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큰 위험은 일반인 검증 문제다. 제작진이 여러 장치를 두고 검증단계를 거치지만 미처 걸러지지 않은 문제들도 있다. 연애 리얼 프로그램인 이상 ‘솔로’를 전제로 하는 당연한 사실을 알면서도 방송에 출연할 목적으로 교제 중인 이성을 숨기고 출연하는 경우다. 사전 제작 과정에서 알게 되면 다행이지만, 이를 미처 모른 채 촬영과 방송이 끝나버릴 경우, 해명할 기회도, 제재할 방법도 없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가장 큰 위험 상황이다.

여러 프로그램을 통해 일반인들의 연애 리얼리티를 다루다 최근 여배우들이 직접 일반인들과 데이트를 하고 썸을 타는 <여배우의 사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채널과 함께 만들어봤다. 기존에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가진 이미지들이 있어 일반인 출연자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연애 프로그램의 대상자가 연예인이냐 일반인이냐 구분은 점점 폭넓게 분포될 거라 생각했다. 연애 대상이 누구건 간에 진정한 리얼리티를 담을 수 있고, 그 안에서 사랑이 성사될 수 있다면 대한민국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대국민 체험 프로젝트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TV조선 <여배우의 사생활> 포스터



과연 여배우들은 사전에 털어놓았던 숱한 걱정과 고민을 내려놓고 상대 앞에 섰고, 그 어떤 연애 상대자들보다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방송 온에어 동안 시청자들과 쌍방향으로 소통하기 열어둔 SNS에는 무려 49,000명 이상의 시청자가 참여했다.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사람들은 사랑을 꿈꾼다. 청춘의 시청자들은 뜨거운 사랑을 꿈꾸고, 중년의 시청자들은 사랑을 추억한다. 상대를 찾지 못한 미혼에게는 희망을 주고, 기혼에 중년인 사람들에게는 대리만족을 가져다준다.

오늘도 TV를 켜면 수많은 사람들이 출연하여 대본 없이 완전한 리얼리티로 연애하며 사랑을 이뤄간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어느 드라마나 영화보다 더 찐한 감동과 여운과 공감대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단지 그 처음의 의도가 변색되지 않게, 아름다운 연애 프로그램의 프레임 안에서 현실과 결탁하지 않는 순수함으로 그 사랑을 원 없이 이루어 가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VOL. 220 2024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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