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익어가는 땅, 체코 모라비아모라비아에서 와인을
- 여행
- 2021. 12. 24.
와인이 익어가는 땅, 체코 모라비아
모라비아에서 와인을
들판에 끝도 없이 펼쳐진 포도밭에는 마지막 포도가 익어가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조각상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이 땅을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석판 위로, 누군가 두고 간 꽃들이 소복하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체코의 남쪽, 모라비아에서 달큰한 와인 향에 취해보는 여행.
글 | 사진. 엄지희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모인 곳
‘체코’ 하면 으레 떠오르는 주류가 있다. 바로 맥주다. 탄산이 적어 부드럽고 풍미가 좋은 맥주는 체코 여행자들에게 늘 사랑받는 술이다. 하지만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3시간만 더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모라비아 지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너른 평야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포도밭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모라비아 사람들은 맥주 대신 와인을 마신다. 손님이 집에 오면 차를 대접하는 대신 “레드 드실래요? 화이트 드실래요?”라고 묻는다. 아침부터 와인을 한 잔 마시면서 생활한다고 하니, 그들의 일상 속에 와인이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또 다른 체코의 이야기. 향긋한 와인 한 잔과 함께 모라비아로 떠나본다.
신이 준 모라비아의 이탈리아, 미쿨로프
미쿨로프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태보호구역 ‘팔라바’ 와인 농장의 언덕 한가운데에 있는 마을이다. 체코의 시인 ‘얀 스카첼’은 이 마을을 ‘신이 준 모라비아의 이탈리아’라고 칭했다. 그만큼 주변 경치와 마을의 풍경, 그리고 중앙에 우뚝 선 성의 경치가 아름답다. 위치 또한 남부 모라비아의 도시 한 가운데에 있어서 이곳에 자리를 잡고 주변으로 여행을 떠나기에도 좋다.
매년 9월 중순이 되면 모라비아의 남쪽 도시 미쿨로프에는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미쿨로프 와인 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작은 유리잔을 손에 쥐고 그해 만들어진 첫 와인을 양껏 마셔볼 수 있는 이 축제는 체코와 유럽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로 언제나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당신이 만약 와인에 관심이 있다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은 지하 저장고다. 이곳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오크통이 숨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거대한 오크통은 길이 6.2m, 무게 약 26t, 지름은 5.2m로 총 10만 1천 리터의 와인을 담을 수 있다. 가까이서 보면 천장에 닿을 듯 거대한 통에 자그마한 수도꼭지가 담겨 있는 것이 어쩐지 언밸런스한 느낌이 든다. 이 저장고는 과거 영주가 세금처럼 와인을 걷던 장소다. 매년 전체 와인 생산량의 1/10을 영주에게 지급해야 했고, 영주는 그렇게 걷은 와인을 이 거대한 오크통에 넣고 섞어 마셨다고 한다.
미쿨로프에서 와이너리에 방문하고 싶다면 거대한 바위 아래에 붙어 있는 ‘포드 코짐 흐라드켐’으로 향할 것. 도시에서 가장 이색적인 와이너리를 가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체코의 전통 음악을 들으며 남부 모라비아의 가정식과 직접 담근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식사가 끝나면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와인셀러 동굴에서 여러 종류의 와인을 테이스팅하며 와이너리 주인장에게 그들의 자부심 가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포드 코짐 흐라드켐의 와인들은 모두 전통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향이 풍부하게 올라오는 것이 특징이다.
모라비아 와인의 집결지, 발티체
발티체에 와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바로 ‘발티체 성’ 지하의 국립와인살롱을 이야기하겠다. 리히텐슈타인 가문이 거주하던 발티체 성은 좌우대칭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바로크양식으로, 입장하기 전부터 그 웅장하고 섬세한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지하에 멋진 와인을 가득 품고 있다는 것까지 포함하면, 이보다 완벽한 장소는 없을 터. 와인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국립와인살롱은 꼭 가봐야 한다. 매년 체코에서 가장 맛있고 좋은 와인 100개를 선정하여 진열해 놓기 때문. 카운터에서 와인 잔을 받고 저장고로 들어가면 거대한 아치형의 와인셀러에 각종 와인들이 전시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작품처럼 가지런하게 진열된 와인 옆에는 품종, 지역, 맛 등이 적힌 안내판도 함께 놓였다. 여기에서는 이 모든 와인을 직접 따라서 맛볼 수 있다. 시음하다가 원하는 와인이 있다면 선반 아래에서 직접 병을 꺼내 바구니에 담고 나가는 길에 결제하면 끝. 오로지 모라비아에서만 만날 수 있는 와인들이 많고, 한국 돈으로 2만 원 정도면 꽤 좋은 품질의 와인을 구매할 수 있으니 여행 기념으로도, 선물용으로도 제격이다. 시음을 즐기는 방법은 크게 2가지다. 90분, 150분을 자유롭게 둘러보며 시음을 하거나, 소믈리에와 함께 추천 와인 6종, 10종을 마셔보는 것. 어떤 방법이든 멋진 와인을 만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 것. 살롱을 나갈 즈음이 되면 모드 발그레하게 술이 오른 얼굴로 양손 가득 와인병을 안고 간다.
발티체에서는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마을 체유코비체의 템플라르스케스클렛 체유코비체 와이너리를 추천한다. 이곳의 와인은 국내에 수입되는 몇 안 되는 체코 와인 중 하나다. 템플기사단이라는 뜻으로, 600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닌 와인셀러를 보유하고 있다. 미로처럼 길게 이어진 셀러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고, 저렴한 가격으로 템플기사단 와인을 구매할 수도 있다. 1층에는 200리터가 들어가는, 체코에서 가장 큰 와인병과 오크통도 볼 수 있다.
자연보호지역 팔라바 안에 있는 마을 파블로프는 규모는 작지만, 모라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마을이다. 이곳 사람들은 집마다 포도밭을 가꾸고 소규모 와이너리를 운영한다. 어쩌면 모라비아에서 가장 다양한 와인을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파블로프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늦은 봄에서 가을 사이가 되면 자전거를 타고 모라비아 지역을 여행하며 이 마을에 방문하는 가족들도 많다고 한다. 와인마을이라는 칭호답게 거리에 늘어선 테이블과 벤치에는 빈 와인 잔이 놓여 있고, 포도를 가득 실은 트럭도 보인다. 막 수확한 포도의 즙을 짜는 와이너리에서는 달큰한 향기가 넘실댄다. 파블로프에서는 문이 열려 있다면 어디나 들어가서 와인을 마실 수 있다. 방문할 때마다 맛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파블로프가 아니라면 마실 수 없는 와인이 한가득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찾는 이들은 매년 다시 돌아온다고.
파블로프 추천 와이러니는 팔라브스카 갈레리에 빈 우 베누세다. 이곳은 소믈리에가 직접 맛을 보고 높은 점수를 매긴 파블로프 대표 와인 60종을 전시한 와인 갤러리 겸 와이너리다. 1층에서 잔을 받고 지하로 내려가면 긴 터널로 이루어진 와인셀러에서 각종 와인을 맛보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단맛, 산미 등을 확인하며 시음할 수 있으니 선호하는 와인 찾기가 조금 더 수월한 편이다. 원하는 와인은 직접 구매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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