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상처받은 자, 사람으로 치유되기를
- 문화
- 2025. 1. 9.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5 2024년 12월호]
이번에도 입소문은 무섭게 퍼져나갔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은 안목 높은 K-시청자들에게 ‘용두용미’라는 평을 들으며 상승 곡선을 타고 최고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구해줘 2>에 이어 장르물로만 날린 2연타. 누군가는 장르물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그래서 시청자들은 더 까다로워지고 평가에 박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사로잡은,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범죄 스릴러를 써낸 서주연 작가가 궁금해졌다.
MBC <백설공주에게 죽음을-Black Out> 서주연 작가
하루아침에 전교 일 등 소년이 살인 용의자로 몰린다. 블랙아웃 된 머릿속엔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사람들은 나를 친구 두 명을 죽인 잔악무도한 살인범이라 한다. 그렇게 속절없이 보상받지 못할 십 년이 흘렀다. 다시 마주한 세상,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부터가 진실인가. 때론 진실이 제일 잔인하다. 우리는 그렇게 고정우(변요한 분)에게 이입하여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원작 소설을 한국적으로 풀어보면 어떨까, 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보니까 너무 재밌을 것 같은 거예요. 사람들의 이기심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촬영 중에도 대본을 계속 쓰고 있었는데요.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데 ‘정말 내가 생각한 대로 연기를 하고 있네’ 싶었어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죠. 배우들이 고생을 정말 많이 했고 그만큼 연기에 진심이었어요. 변요한 씨는 수염이 어느 정도 있는 게 좋은지를 논의할 정도로 캐릭터 분석에 열의를 보였죠. 고정우 캐릭터의 특성상 대사량보다는 눈으로 얘기하는 부분이 많았는데, 눈으로도 연기가 된다는 걸 느끼게 해줬어요. 고준 배우도 초고에서는 좀 더 더티하고 제멋대로인 캐릭터였는데, 중간에 한번 캐릭터를 수정해서 지금 역할이 나왔어요. 변요한 씨와 고준 씨, 두 사람의 합이 정말 좋았죠. 브로맨스 부분도 그렇고요.
특히 보영 엄마(박미현 분)가 보영이 시신을 찾고 오열하는 장면에서는 같이 울었다는 스태프들이 있었을 정도였어요. 권해효, 조재윤 배우도 그렇고, 부모 역할을 한 중년 배우분들의 연기도 대단했죠. 진짜 가해자, 피해자 부모인 것처럼요.
어쩜 사람이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너무 현실적이라서 더 소름 끼치는 병무와 민수 아버지의 대사가 많은 시청자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부모들은 오직 자기 자식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잖아요. 가해자 부모들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죠. 오히려 피해자 탓을 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대사를 쓸 때 일부러 실제 가해자 부모들의 말을 인용해서 쓰기도 했어요. 병무나 민수 아버지가 그러거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둘이 사귀었다더라’, ‘내가 얼마나 예뻐했냐, 이런 일 없었으면 결혼시켜서 며느리로 삼았을 거다’··· 실제로 강간이나 교제 폭력 가해자 부모들이 많이 하는 말이에요. 실제로는 더 심한 말도 많이 있었지만, 차마 드라마로 쓰진 못했고요.
악에는 더한 악으로 맞서서 ‘사이다’를 날려주는 캐릭터가 대세인 시대에 고정우는 끝까지 ‘흑화’하지 않았다. 고정우가 끝까지 선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원작에서 제일 많이 각색한 캐릭터가 고정우 캐릭터예요.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하는 역할이 크지 않아서 저는 좀 답답했거든요. 그래서 좀 더 정우에게 많은 역할을 부여했죠. 그리고 정우가 흑화하지 않은 건, 일단 엄마가 깨어나면서 정신을 차린 부분도 있고요. 또 엇나가려 할 때마다 옆에서 잡아준 상철(고준 분)과 설이(김보라 분)가 있기 때문이에요. 원래 제가 쓴 기획 의도로 보면 사람을 잃고 배신당했지만, 결국은 위로도 사람으로 받는 거거든요. 정우는 친구들을 잃어버렸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친구들이 생기죠. 결국 사람에서 시작돼서 사람으로 귀결되는 이야기였어요.
장르물인 <구해줘2>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두 작품 모두 뒷심을 제대로 발휘하며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마니아층만 봤다고 하기엔 엄청난 성과다. 계속 장르물을 고수했던 건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어서였을까.
처음에는 시청률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MBC에서 나갔는데, 이렇게까지 안 나올 수 있다고? (웃음) 자신감이라기보다는, 그래도 볼 사람은 보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두 작품 다 장르물이고 로맨스가 거의 없는 드라마라서 시청률에 대한 기대는 처음부터 아무도 하지 않았어요. (웃음) 예상보다는 시청률이 계속 올라갔기 때문에, 저는 그냥 감사할 뿐이죠.
많은 드라마 작가가 그렇듯, 저도 처음엔 로맨틱 코미디(이하 로코)를 썼어요. 확률적으로 로코가 잘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로코도 좋아하긴 하지만,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 스릴러, 형사물이거든요. 그래서 습작으로 썼어요. 그런데 결국 좋아하다 보니까, 장르물로 넘어가게 된 것 같아요. 평상시에도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나 사건 사고 관련한 유튜브를 늘 틀어놓고 살아요. 들으며 자기도 하고요. 저는 그게 재밌어요. 하지만 실생활에서 공포심이 들 때도 있긴 하죠. 너무 많이 보고 듣다 보니까, 그냥 새벽에 쓰레기차가 지나가면 ‘저기 실려있는 게 다 쓰레기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달까요. 추리도 좋아하고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결국은 스릴러물을 끝까지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장르물을 쓰나 봐요.
이젠 대중교통을 탈 때도 자연스럽게 사람을 관찰하게 된다는 서주연 작가. ‘저 사람은 어떤 인생을 살아왔을까?’부터 시작해서, ‘어떤 하루를 보냈길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까?’, 각종 상상을 하게 된다고. 처음부터 사람과 세상에 관심이 많았던 걸까.
아니요, 저는 예능 프로그램을 하다가 라디오 작가가 됐어요. 시사 라디오도 했고요. 제가 E의 성향을 가진 ‘INTP’라서 원래 남한테 관심이 일절 없었어요. 방송국에서 무슨 소문이 나면 제가 제일 늦게 알 정도로요. 그런데 시사 프로그램을 하면서 세상에 관심이 엄청 많이 생겼어요. 그리고 라디오라는 매체 속성상, 팀이랑 가족처럼 지내잖아요. 막내 작가가 남자 친구랑 왜 헤어졌는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요(웃음). DJ와도 엄청나게 가까워지죠. 라디오를 하면서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되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 드라마가 쓰고 싶어진 것 같아요.
그리고 라디오 작가들 중에 드라마에 관심 있는 분들이 꽤 있어요. 라디오 작가들이 기본적으로 글을 잘 쓰거든요. 초고가 그대로 방송에 나가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막상 시작해 보면, 드라마는 글 쓰는 기법이 아예 달라요. 그래도 대신 빨리 습득할 순 있죠. 내가 잘 쓰는데, 이게 메이드가 안 되는 데서 오는 타격감 때문에 많이들 포기하는 것 같아요. 저는 운 좋게 빨리 발을 담근 편이긴 하지만요.
이번 작품 역시 쉽지 않았다. 촬영은 2년 반 전에 끝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야 시청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단 이것 외에도 그간 왜 우여곡절이 없었을까.
제일 먼저 만난 분이 송현욱 감독님인데, 엎어지긴 했지만 감독님한테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원영실 작가와도 같이 작업했는데 그 친구한테도 많이 배웠고요. 하지만 그 뒤로 정말 많이 엎어졌어요. 웹드라마도 엎어지고, 공모전도 문턱까지 갔다가 떨어지고요. 라디오 작가를 할 때는 글을 쓰면 매달 돈을 받았는데, 드라마 작가는 계약금만 받고 돈을 안 받으니까 그게 제일 힘들었죠. 하지만 그렇게 엎어지며 글을 썼던 5년여의 세월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초반에 데뷔했으면 글을 못 쓰는데 데뷔한 운 좋은 작가가 됐을 것 같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시련이 있어서 공부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숱하게 엎어졌지만 그 시련을 담금질 삼아 글을 썼다. <구해줘 2> 시절, 하루에 열네 시간씩 일을 하면서도 마냥 행복했다던 서주연 작가. 우리가 그의 다음 작품을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불어 어떤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은지,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제가 작가협회 교육원 연수반을 출석 미달로 한 10년은 다닌 것 같아요(웃음). 그러다 작정하고 제대로 다녀야겠다고 생각해서 연수반을 졸업하고 전문반으로 올라갔죠. 전문반에서 구본근 CP님을 선생님으로 만났는데, 혹시 방송일을 하냐고 물어보셨어요. 시청률을 너무 신경 쓴 냄새가 난다면서요. 그땐 기분이 좀 상했죠(웃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진짜 가벼운 말장난에만 기대서 감정선을 고려하지 않고 썼더라고요. 그래서 드라마 작가를 하려면 사람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습작하고 엎어지는 동안에 저는 스스로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나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구해줘2>가 나가고 나선,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싶었죠. 제가 어떤 사람인지가 글에 다 나오더라고요. 저는 드라마 작가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자기 수양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요즘은 이명우 감독님과 삼류 변호사 이야기를 준비 중이고요. 목표가 있다면 제가 생각해도 대반전이 있는 장르물을 써보고 싶어요. 사실 요즘 드라마를 세 편 정도 연달아 하기 전까지는 드라마 작가로 자리 잡기가 참 힘들거든요. 드라마는 엉덩이하고의 싸움인데, 매일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 반성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드라마를 쓰는 과정은 정말 힘들지만 작품이 방송을 탔을 때, 그 성취감이나 만족도는 어떤 장르보다 높은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드라마를 쓰고 싶어요. 그 기쁨을 잘 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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