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November

kyung sung NEWS LETTER

손바닥에 도시가 흐르는 내 고향, 꿈엔들 잊힐리야 충북 옥천 정지용문학관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한가로운 구읍의 풍경을 품은 자그마한 문학관은 정지용의 시와 많이 닮았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에는 발길 닿는 곳마다 시인의 향취가 흩날린다. 키 낮은 담벼락마다 영롱한 시어들이 말을 건네니, 걷다가 쉬다가 시인을 만나거든 그 처연한 아름다움에 맘껏 탄복하면 그만이다.

글. 윤진아   사진. 정우철


한국 대표 서정시인·현대시의 선구자

정지용문학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떠나온 고향을 찾아가는 느낌이다. 마을을 가로질러 실개천이 흐르고, 천변을 따라 키 낮은 집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향수마을아파트, 향수식품, 향수요양원, 향수주유소, 향수사계절식당, 옥천향수 100리길…. 옥천 구읍은 간판마다 온통 ‘향수’가 묻어난다. 문학관 앞 구읍식당의 창문에도 정지용의 시 <고향>이 반듯하게 붙어 있고, 맞은편 정육점에는 얼룩빼기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운다. 담뱃가게는 “모초롬 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라는 <오월 소식>의 구절을 간판처럼 걸었다. 실개천 난간에도 시가 걸려 있다. <정지용시집>(1948)과 <백록담>(1950)에 실린 시들이다.

정지용(鄭芝溶) 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 실개천변의 가난한 초가에서 태어났다. 모름지기 전 국민이 알고 있을 듯한 <향수>는 일본 유학시절 고향을 그리면서 쓴 시로, 1927년 <조선지광>에 발표됐다. 1920∼1940년대에 활동한 정지용은 절제된 감정과 섬세한 언어감각으로 시를 빚어 한국 현대시의 성숙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빼어난 후배 시인들을 발굴한 심사위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33년 문장지 추천위원을 맡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을 문단에 배출했는데, 1946년 윤동주를 세상에 소개한 이도 바로 정지용이다. 정지용이 조지훈 시인에게 보낸 편지 사본에서는 그의 소탈한 인간성을 짐작할 수 있다. “나를 보고 스승이란 말슴이 만부당하오나 구지 스승이라 부르실 바에야 스승 못지않은 형 노릇마자 구타여 사양할 것이 아니오매, 이제로 내가 형이로라 거들거리며 그대를 공경하오리다….”

호수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옛이야기 지줄대는 곳

 

작은 사립문을 지나 정지용 생가에 들어서면 단출한 3칸짜리 집과 창고가 마주보고 있다. 담장 옆에는 황소에 올라타 피리 부는 소년의 조각상이 시선을 붙잡는다. 마당 한쪽의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은 ‘오빠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둔 홍시처럼 정겹다. 생가 안방에는 동그란 안경을 쓴 시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이라는 시 구절처럼, 어쩐지 늙은 아버지가 방 안에 누워 있을 것만 같다.

120편의 작품을 남긴 정지용은 6·25 전쟁통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인민군에 잡혀가 납북돼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고 소문과 추측만 떠돌았다. 한국 정부는 정지용 시인을 월북작가로 분류해 작품 모두를 판금시켰다. 정지용의 작품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건 30여 년이 지난 1988년이다. ‘지용회’를 중심으로 1996년 생가가 복원됐고, 벽에 ‘지용유적 제1호’임을 알리는 청동 표지판을 붙여놨다.

생가 옆에 문을 연 문학관은 정지용의 인생과 문학,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를 소상히 알려준다. 스크린북에 영상을 내보내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문학관에서 나와 조금만 걸으면 장계국민관광지가 있다. 낙후된 유원지를 옥천군이 ‘멋진 신세계’로 꾸몄다. 정지용의 시 세계를 공간적으로 해석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여러 작가가 시를 모티프로 참여해 시와 예술,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을 만들었다. 원고지 한 장을 건물과 광장으로 연출한 ‘모단광장’에서 좀 더 아래로 내려오면 금강을 조망하며 시인의 작품을 돌아볼 수도 있다. 정지용 생가는 ‘향수 100리 길’의 시점이자 종점이기도 하다. 대청호반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며 달릴 수 있는 자전거길(총 50.6km)로, 정지용 생가에서 장계관광지, 안남면 소재지, 청성면 합금리 금강변, 금강휴게소, 옥천선사공원을 돌고 다시 시인의 생가로 돌아오는 코스다.


떠나온 옛 고향 찾아가는 길

바다1

당신은 이러한 풍경을 데불고
흰 연기 같은
바다
멀리멀리 항해합쇼

 

4대 독자로 태어난 정지용은 당시 풍습에 따라 보통학교 다니던 12세 때 장가를 들었다.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있는 집을 떠나 긴 객지생활을 시작했다고 하니, 고향이 얼마나 그리웠을지 쉬이 짐작할 만하다.

생가 툇마루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점점 커지는 실개천 물소리를 듣다 보면, 향수 어린 풍경들이 실사처럼 펼쳐지며 마치 내 고향집을 찾아온 듯 가슴이 따뜻해진다.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가지붕 밑 흐릿한 불빛에 가족들이 돌아앉아 도란도란 수다떠는 모습도 그려진다. 키 큰 참나무 사이로 옥천 구읍을 내려다보는 시인의 동상에는 가슴에 사무치는 한 마디가 새겨져 있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문학관과 생가 관람안내

 

 

관람시간 - 화요일~일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50분까지
휴관 -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문의 - 043-730-3407~8

 

 

 

 

[출처 : 사학연금 2022년 8월 제 4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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