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 존재하는 특별한 인연 MBC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 유지혜 작가
- 사람
- 2024. 5. 28.
[출처 :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웹진 2024년 4월호]
마다가스카르의 드넓고 푸른 바닷가에서의 작살 낚시를 꿈꿨던 한 여행자. 정작 현실은 날씨 때문에 발목이 묶인 채 빗물 섞인 길거리 라면과 함께였다. 이것이 여행이고 인생이 아니면 무엇일까. 영작 오류로 얻어걸려(?) 탄생한 “태어난 것은 여행이다”라는 명언답게, 깜빡이 없이 들어오는 모든 돌발 상황과 더불어 소중한 인연들까지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남자들이 세 번째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글·사진. 김선미 편집자
첫 번째 시즌의 여행지 남미를 시작으로, 다음 시즌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까지 발자국을 남기고 온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이하 태계일주). 태어난 김에 사는 남자 기안84를 중심으로 이시언, 빠니보틀, 덱스가 합류해 끈끈하다 못해 끈적한(?) 우정을 과시했다. 무근본, 무계획, 무걱정형 남자들의 만남으로 채운 출발과 끝만 있는 이 투박한 여정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파일럿 프로그램인 <독수공방>을 같이 했던 김지우 PD한테 전화가 왔어요. 기안84랑 같이 뭔가를 할 건데, 와서 일단 차나 한잔 마시자고. 근데 그게 아니었죠, 엄청난 회의였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기안84의 그 자유로운 영혼과 오픈 마인드가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만나면 굉장한 극 장점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돌발 상황이나 실수가 있어도 그대로 담아볼 수 있겠다 싶었고요. 제작진의 개입은 절대적으로 최소화하고 여행자의 의사결정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역으로 제작진은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비하고 시뮬레이션해 봐야 했는데요. 그럼에도 예상대로 된 게 거의 없다시피 했죠. 촬영 시작하고 나서 우리 프로그램이 뭔가 다르겠다 싶었던 순간이, 기안84가 아마존에 도착한 첫날 숙소를 잡고 샤워를 하면서 옷을 빨았거든요. 그걸 사람들 다니는 야외 로비에다가 널더라고요. 애초에 거기다가 빨래를 널어놓는 행동 자체도 일반적이지 않은데 그 와중에 비까지 내려서 옷이 쫄딱 젖은 거예요. 그걸 또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넘어가더라고요. 아, 모든 돌발과 즉흥성은 기안으로부터 나오겠구나 싶었죠.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대에서 좋아해 주셔서 신기했고, 다음 시즌을 이어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어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스타일의 극사실주의 여행 예능’이라는 기획 콘셉트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제작진의 카메라는 식욕을 돋우는 음식의 향연,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눈만 마주쳐도 웃어주는 따스한 현지인만을 담지 않는다. 시골 민심으로 가득했던 모론다바에서 따뜻하게 데워졌던 마음이, 도시 안타나나리보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바닐라를 강매(?)시키며 바가지 씌우는 현지인 덕분에 차게 식었고, 급격히 다운돼버린 기안84의 감정은 고스란히 전파를 탔다.
여행이 무조건 즐겁기만 한 건 아니니까요. 현지에서 그렇게 ‘눈탱이를 맞았’다면(피해당사자의 표현)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불편한 감정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냥 좋고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게 되면 우리만의 유니크함이 없어질 테니까요.
처음에 기안84가 혼자서 남미로 떠났을 때 정-말 외로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루 뒤에 배우 이시언이 왔을 때는 너무너무 반가웠으면 했거든요. 그 반응이 진정성 있게 표출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제작진이 많은 노력을 했어요. 심지어 여행 시작하기 전에 제작진이랑 밥 한 끼 정도는 같이 먹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런 것도 일절 안 했죠. 모르는 게 생겨서 물어봐도 물어보지 말라고 하고(웃음). 그랬더니 둘이 만났을 때 정말 ‘찐’으로 반가워하더라고요.
시즌 전 일정에 참여한 기안84와 빠니보틀, 첫 여행지인 남미에 동행한 이시언, 그리고 두 번째 여행지 인도 여정에 참여한 덱스. 네 남자는 대망의 여행지, 마다가스카르에서 완전체를 이뤘다.
시언 오빠는 기안84와 막역한 사이인 것 이상으로, 시즌 1, 2, 3을 다 이어주는 역할을 해준 사람이에요. 가장 멤버들을 챙기고 먼저 연락하는 것도 시언 오빠죠. 마지막 편에 이르러서는 거의 엄마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동생들이 시언맘이라고 불렀을 정도니까요. 빠니보틀과 덱스는 다른 멤버들과 전혀 관계성이 없는 상태에서 만나 완벽한 메이트가 된 케이스예요. 덱스는 <가짜 사나이>에서 확실히 자기 몫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보고 <피의 게임>에 제가 추천해서 미팅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 모두를 다 사로잡더라고요. 이번 <태계일주>도 마찬가지고요. 모두를 집중시키는 힘이 있고, 즉흥적인 면이 기안84와 굉장히 닮은 친구죠. 빠니보틀 같은 경우 대한민국 1등 여행 유튜버인 만큼 꼭 플레이어가 아니더라도 도움받을 수 있는 부분이 있었으면 했었는데, 아는 게 많은 것 이상으로 정말 엄청난 조력자 역할을 해줬어요. 가장 대화도 많이 하고, 제작진한테 심정적으로도 아주 많은 도움을 줬고요. 제작진도 힘들 수 있잖아요(웃음).
거침없이 갠지스강물을 떠먹는 기안84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경악하게 했지만, 그것은 기행이기보다는 그들의 문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표출된 행동이 아니었을까. 촬영 전 나눴던 제작진과의 많은 대화에는, 단순히 현지인들의 삶을 구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삶 속 깊이 들어가 밀착해 지내보고 싶다는 기안84의 바람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통역을 제외하고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직접 소통하면서 친밀감을 쌓아가는 과정을 보여줬고, 이는 유지혜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기대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유지혜 작가는 일찍이 ‘아마존 경력자’였다. <사랑의 리퀘스트>에서 5년 차 작가로 일하고 있을 당시에 담당 PD가 해외 관련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었고, 과거 수혜국에서 이제는 지원국이 된 우리나라가 할 수 있는 걸 담아보자는 유지혜 작가의 의견이 반영돼 <희망로드 대장정>이 만들어졌다. 당시 분쟁지역이었던 아프리카 남수단, 국민 인구보다 땅에 묻힌 지뢰 수가 훨씬 많았던 앙골라 등지를 다니며 할 수 있는 고생은 다 해본 것 같다는 유지혜 작가.
이번 프로그램하면서 고생 많이 했겠다는 질문에 사실 저는 별 감흥이 없어요. 그때 이미 최대치의 고생을 했거든요(웃음). 그러고 나서 2014년도에 <아마존의 눈물> 스핀오프 예능이었던 <글로벌 홈스테이 집으로>를 하게 됐는데, <아마존의 눈물>에 나왔던 야물루 라는 소녀가 '도시가 궁금하다'는 얘기를 했었던 것에서 시작된 프로그램이었어요.
한국으로 초대해 도시를 구경시켜 주기 전에 아마존에서의 생활도 담아야 하니 아마존에 가야 했죠. 그때 현지인하고 소통하는 작업을 많이 해봤었어요. 매번 통역에 의지할 환경이 못 됐기 때문에 그냥 막 보디랭귀지를 쓰거나, 아니면 미리 현지어들을 엄청 공부해 갔는데, 그렇게 현지 단어 하나라도 얘기를 하면 이 사람들 표정이 너무 다른 거죠.야물루가 한국에 왔을 때도 제가 계속 그런 노력을 하니까 저랑 제일 친했고 정이 많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하고도 친밀해질 수 있고, 이런 것도 예능적으로 풀 수가 있겠구나’ 생각했었어요.
이번에 <남미 편> 볼리비아에서 만났던 기안84와 동갑내기 친구였던 포르피가 그런 경우인데, 현지인 만나는 게 중요한 포인트라는 생각으로 기안84 혼자 포르피를 만나게 했어요. 회의하면서 혼자 가면 의사소통이 너무 안 될 텐데 괜찮을까, 통역을 붙여줘야 하지 않을까 의견이 분분했는데, 제가 해본 게 있잖아요. 말이 통한다고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안 친해지는 것도 아니고. 노력에 따라 서로 마음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서 그걸 좀 밀어붙였어요. 꼭 필요한 상황에서는 통역을 붙여주고 나머지는 기안84의 노력에 맡겼죠. 나중에 집에 도착해서 하는 말이, 포르피 때문에 스페인어에 귀가 트였대요(웃음). 그렇게 저희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고, 그 뒤에 프로피가 한국에 와서 다 같이 반갑게 만나기도 했어요. 마음이 되게 이상해요. 지구 반대편에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게.
작가 면접을 볼 때마다 밝히곤 했던 “일하면서 내가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는 확고한 뜻을 유지혜 작가는 이번 <태계일주>에서 이뤘다. 일등 공신 기안84는 지난해 MBC 연예대상을 받았고 올해의 프로그램상이라는 값진 결실도 얻었다. 2006년 월드컵 특집 기획단으로 방송일을 시작해 <출발 드림팀>, <일밤>, <피의 게임 1>을 거치다 보니 내년이면 어느덧 햇수로 20년. 이토록 하드코어한 프로그램을 세 번의 시즌이나 내달린 직후라 당분간은 엄두가 안 나는 마음이겠거니 했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다음 시즌 계획에 대한 질문에, 아직 더 해보고싶은 것이 많아서 기안84의 일정만 허락된다면 가급적 빨리 돌아오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침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식지 않는 열정의 동력은 무엇일까.
일하다 보면 한 번씩 때려치우고 싶단 생각, 하겠죠. 근데 눈 뜨고 보면 또 일하고 있고 그래요. 쉬고 싶지만 쉬어도 쉬는 게 아닌, 운명 같고 숙명 같은 느낌? <태계일주>가 진짜 힘든 프로그램이었는데, 저희 팀원들 모두가 정말 재밌게 했어요. 회의할 때마다 더 재미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면서 서로 욕심이 생기고. 시즌 1을 하고 2, 3을 이어나가면서 다들 느꼈던 것 같아요. 이 프로그램은 재밌다. 재밌는 게 확실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만 재미있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되니까 더 힘을 얻으면서 할 수 있었어요. 재밌어야죠. 그래야 할 수 있고, 그래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0년 전, 한 달 일정의 유럽 여행길에 오른 유지혜 작가. 로마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려는 차에 로마 공항에 불이 났다. 타야 할 비행기는 뜨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로마에 하루 더 머무르며 낮에 봤던 콜로세움을 밤에 다시 보러 갔다. 그때 그토록 멋진 밤의 콜로세움을 보지 못하고 떠났으면 어쩔 뻔했을까. 어떤 변수나 악재도 추억으로 만들어버리는 여행의 낭만이 그립다면 바로 지금, 훌쩍 떠나볼 순간이다.
* 프로그램 관련 사진은 인터뷰이가 제공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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