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無爲)한 시간의 쓸모
- 컬럼
- 2025. 1. 13.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5 2024년 12월호]
연말의 감흥이 대개 그렇지만 1년 전 이 무렵 유독 허전하고 우울했다. 대기업이 초중고에 AI와 SW 교육을 제공하는 사회공헌 사업에서 취재 원고 만드는 일을 3년간 맡아 했는데, 기업이 작년으로 사업 종결을 선언한 것이다. 많을 땐 한 달에 서너 번 전국을 다니며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게 삶의 동력이기도 했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의미도 쓸모도 없다 여기며 동동거린 세월이 짧지 않았으니, 곧 숭숭 구멍이 뚫릴 시간에 지레 겁을 먹고 침울해진 셈이다.
글. 강의모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MBC 라디오 <오미희의 가요응접실>
SBS 라디오 <최백호의 낭만시대>,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저서 ≪땡큐,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살아 있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린 결말입니다≫
2023년 마지막 날, 2018년생 손자가 집에 왔다. 녀석은 만나자마자 기쁨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할머니, 저 내일이면 일곱 살 돼요!” 그리고 잠들 때까지 달뜬 표정으로 계속 소리를 질렀다. “이제 한 밤만 자면 일곱 살이에요.” 내일이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를 토닥이며 생각했다. ‘저토록 설레며 미래를 기다려 본 게 언제였을까, 내게도 그런 때가 있기는 했을까?’ 밤새 복잡하게 엉키는 생각들을 풀어내다가 가장 단순한 해법을 찾았다.
‘덜 열심히 살기: 일하는 시간은 압축해서 집중하고 남은 시간은 최대한 무위하게 설렁설렁 살기’.
2024년 들어 첫 번째로 시도한 설렁설렁은 물에서 놀기다. 물 공포심이 별나서 평생 멀리하다 50대 후반에 용기를 냈으나 두 달 만에 포기했던 수영. 학습 지진아로 상처받은 경험을 극복하고자 일대일 교육을 신청했다. 경제적 부담이 있긴 했지만 1년 정도는 내가 번 돈 아낌없이 내게 투자하자는 각오로 과감히 시도했다. 시간과 돈을 나름 호기롭게 쓰는 대단한 결심이었다.
한 달에 5회에서 8회 정도 강습을 받은 지 어느새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호흡이 제대로 트이지 않는다. 한여름에는 코로나19를 앓았고 가을엔 중이염으로 쉰 탓도 있지만, 유유자적 철벅거리며 아주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도 꽤 행복하다. 굳이 서두를 이유도 없다.
강사님 역시 나이 많고 굼뜬 수강생 때문에 속이 터질 법한데 늘 괜찮다며 웃는다. 그분에게 듣는 최고의 칭찬은 “회원님은 즐기면서 하니까 참 좋아요!”다. 주변에선 연습을 해야 실력이 는다고 자유 수영을 다니라고 권하지만 애초 그런 욕심은 마음에 담지도 않았다.
두 번째 설렁설렁은 원서 읽기다. 기억력 감퇴를 조금이나마 예방할 겸, 심심풀이 삼아 영어책을 혼자 천천히 읽어보기로 했다. 짧지만 풍성한 클레어 키건의 소설 ≪Foster≫-번역판 제목 ≪맡겨진 소녀≫-를 주문한 게 4월 중반. 그의 작품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고 이 소설도 궁금했던 참이었다.
원문 88쪽의 얇은 책을 모니터 앞 받침대에 펼쳐 놓으니 과연 할 수 있을까? 헛웃음이 먼저 나왔다. 일단 원문을 한 문장씩 쓰고 모르는 단어를 찾으며 떠듬떠듬 한글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낯설고 서툰 과정이 신선했다. 도저히 해득이 어려운 문장은 적당히 포기했고, 문학적 상상력을 따르지 못하는 파파고의 버벅거림을 보면서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번역가에 대한 존경심이 새삼 깊어졌다.
올해 안엔 대충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 또한 한여름의 무도한 더위와 열병으로 멈춘 시간이 길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어떤 완성도를 기대하는 것도 아닌 작업이니 여유롭다 못해 지지부진이다. 해를 넘기면 어떠하리. 끝까지 해낸 후 번역서를 사서 대조하며 읽으면 얼마나 부끄럽고도 웃기고도 즐거울까! 그 순간을 상상하며 굼벵이처럼 나아가고 있다.
세 번째 설렁설렁은 두 번째와 같은 맥락인 영어 화상수업이다. 수업이랄 것도 없고, 일주일에 두 번 20분씩 필리핀 친구랑 동문서답이 대부분인 대화를 나눈다. 그녀에게 내가 자주 외치는 말은 “Wait a Minute!” 번역기를 돌리고 떠듬떠듬 한두 마디 건네다 보면 헤어질 시간이다. 가끔 녹화된 동영상을 돌려보면 헛소리만 하면서도 안달하지 않고 계속 웃는 내 모습을 스스로 사랑하게 된다. 하여 이것도 열 달째 지속 중이다.
물론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일은 2006년에 시작해 18년을 넘기고 있는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 프로그램이다. 방송작가로서 내 수명은 언제까지일까? 하는 의심은 이미 내려놓았다. 그저 이어지는 한 해 한 해를 기적으로 여기며 일상의 중심에 <책하고 놀자>를 놓고 있다. 올 한 해 그 집중이 더 잘됐다면, 그건 빈틈을 설렁설렁 잘 채운 덕분이라고 믿는다.
사실 ‘작가공감’ 에세이를 쓰기로 해놓곤 막막함이 앞섰다. 컴퓨터를 끄고 경북 영주로 훌쩍 떠났다. 힘든 수술 후 회복 중인 동창 위문도 할 겸, 마음의 고향처럼 언제나 아련히 그리운 부석사도 거닐 겸. 늦가을 풍광에 푹 젖은 나들이를 마치고서야 짧은 글 하나가 마무리됐다. 이렇게 무위한 시간은 그 쓸모를 다시 한번 증명한 셈이다.
올 연말의 감상은 작년과 달리 대체로 나쁘지 않다. 새해엔 빈 시간이 더 많아질 수 있겠지만, 그럼 또 다른 무위한 무엇으로 지루함을 메우면 되겠지, ‘이를테면 음···’에서 생각을 멈춘다. 이런 기대도 설렁설렁 비워두기로 한다.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방송작가 VOL.225 202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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