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붉은 그리움을 만나다, 고창 꽃무릇 여행
- 여행
- 2020. 9. 10.
고창 선운사는 대웅전 뒷산을 뒤덮은 동백으로 기억되는 절이다. 미당 서정주가 이 동백의 처연함에 반해 읊조린 멋진 시 한 수는 웬만한 사람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가을 풍경이 깃든 도솔암 가는 길은 언제 걸어도 좋다. 시인 정찬주는 이 길을 두고 ‘인간 세상에서 하늘로 가는 기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도솔천을 온통 붉게 물들인 꽃무릇
단풍이 들기 전 고창 ‘선운사’를 붉게 물들이는 건 꽃무릇이다. 평생을 가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꽃으로 9월 말부터 10월 초면 붉은 꽃이 핀다. 그 모양도 애처롭다. 가느다란 줄기 위에 덩그러니 달린 밤톨 만한 꽃송이가 위태로워 보인다. 바람이 불면 대궁은 곧 부러지기라도 할 듯 흔들린다. 선운사에 도착해 입구에 들어서니 눈이 환해졌다. 입장권을 끊고 절 경내에 들어서면 눈에 보이는 것은 초록색과 붉은색뿐이다. 나무 그늘마다 한 줌씩 피어있는 꽃무릇. 미인의 속눈썹처럼 길고 가느다랗게 휘어진 꽃을 보고 도솔암으로 올라가는 등산객들이 ‘이쁘다. 이쁘다’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꽃무릇은 선운사로 향하는 길을 따라 난 도솔천 건너편에 많다. 도솔천 건너편은 단풍나무, 참식나무, 굴참나무가 가득한 빽빽한 숲이 이어진다. 나무 아래 핀 붉은 상사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을 연출한다. 신발을 벗고 징검다리를 건너면 개울 건너편 꽃천지로 갈 수 있다. 꽃밭에는 꽃을 감상하라며 아담한 산책로가 놓여 있다.
꽃무릇을 흔히 상사화(相思花)와 혼동을 하는데 엄연히 다른 꽃이다. 상사화는 칠월 칠석을 전후로 피고, 꽃무릇은 백로와 추분 사이에 핀다. 다만 입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꽃이라는 사실은 같다. 일본에서 혹은 중국에서 들어온 꽃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의 남부 지방에 군락이 많아서 일본 유입설도 있고, 일본에서 부르는 꽃 이름 중 ‘만주의 꽃’이라는 것이 있어 중국 유입설도 있다.
사실 꽃무릇은 웬만한 고찰이면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다. 금어(金漁·탱화를 그리는 스님)가 탱화를 그릴 때 구근을 가루로 만들어 물감에 타서 그리면 좀이 슬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절 마다 꽃무릇을 심었고, 지금은 영광 불갑사와 함평 용천사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선운사 꽃무릇을 보기에 가장 좋을 때는 해 뜰 무렵이다. 전나무숲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받는 꽃무릇이 얼마나 이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꽃 속에 묻혀 가벼운 산책도 할 수 있어 더 행복하다.
꽃무릇의 풍경을 지나면 선운사에 도착한다. 평지사찰로 강당과 대웅전, 그리고 여러 법당들이 한 마당에 깃들어 있다. 법당이 너무 조밀하게 배치돼 있지도, 어수선하게 펼쳐져 있지도 않다.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 검단선사가 창건했다. 당시 89개의 절집에 3,000명이 넘는 승려가 수도했다는 대찰이었다. 지금도 전북 지역에서 김제의 금산사와 함께 가장 크다고 손꼽히며,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북 유형문화재 9점이 있다. 선운사의 절 마당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고 천천히 마당을 거닐고, 절 안에 있는 찻집에서 맑은 녹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절 마당으로 오후의 풍경 소리와 여행객들의 웃음 소리가 내려앉는다.
가을 풍경 속 도솔암 가는 길
이제 선운사에서 나와 도솔암 가는 길에 오를 차례다. 도솔암의 정확한 이름은 도솔천 내원궁. 벼랑 끝에 터를 겨우 닦아 만든 작은 암자다. 108배에 열중인 사람들 사이에서 스님이 경을 읽고 있다. 도솔천은 불교 성역 수미산 꼭대기의 천계(天界)요, 내원궁은 미래불인 미륵불이 머무는 거처다. 세파에 지친 민중들을 달래주는 존재. 19세기 말, 신천지를 꿈꿨던 동학 농민들도 이 도솔천과 인연이 닿아 있다. 바로 거대한 마애불이다. 이 부처님 배꼽에 있는 복장감실에 세상을 바꿀 비결과 벼락살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해서 1820년, 새로 부임한 전라감사 이서구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감실을 뜯고 책을 열었는데 책 첫 문장이 이러했다. “이서구가 열어본다.” 기겁한 이서구 머리 위로 벼락이 쳤고, 이서구는 책을 던져 놓고 도망갔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1892년, “이서구가 벼락을 맞았으니 안전하다”는 판단과 함께 동학도들이 다시 4 감실을 열어 책을 가져갔다. 이 일로 동학도 수백 명이 문초를 당하고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내원궁에서 산 쪽을 보면 천마봉이 우뚝 서 있다. 한동안 땀을 식힌 후 다시 천마봉으로 향한다. 능선을 따라 저벅저벅 걸어가면 가는 길에 용문굴이 나온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의 어머니가 죽은 곳이다. 돌무덤이 남아 있는데 굴 자체가 성문처럼 웅장하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가면 까마득하게 멀어 보이던 낙조대가 나온다. 쫓겨난 최 상궁이 떨어져 죽은 곳이다. 여기까지만 가도 그저 좋겠지만 또 아무렇지도 않게 걸으면 천마봉 정상에 도달한다.
천마봉에 오르면 내원궁이라는 작은 암자가 거대한 암봉 무리 한가운데에 꽃처럼 박혀 있다. 작은 절집 하나가 아니라 그 봉우리 전체를 가지고 있는 거대한 공간이다. 이서구가 벼락을 맞았고, 동학군이 비결을 빼냈던 감실이 부처님 오른편 아래에 자그마하게 걸려 있다.
선운사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서정주 시인의 고향 마을에 자리한 ‘미당시문학관’을 만날 수 있다.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를 개조해서 꾸몄으며 미당의 작품 활동과 관련한 다양한 전시물을 살펴볼 수 있다. 옥상에서 미당의 고향인 질마재 마을 너머로 변산반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아이들과 하는 갯벌 체험
아이들과 함께 갔다면 고창 ‘구시포 해변’으로 떠나보자. 즐거운 갯벌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구시포의 원래 이름은 새나리불영(새 바닷가의 불같이 일어날 마을)이었지만 일제강점기에 구시포로 바뀌었다. 아홉 개 마을이란 뜻이다. 염전을 일구기 위해 수문(水門)을 설치했는데 수문이 소여물을 담는 구시(구유의 방언)같이 생겨서 구시포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구시포 해변으로 가려면 자룡리 선착장을 지나서 보이는 길게 이어진 포구가 구시처럼 보이는데 썰물 때면 포구 양옆으로 어선들이 갯벌에 바닥을 대고 늘어선다.
선착장을 지나면 마을이 보인다. 식당과 횟집, 슈퍼마켓 등이 구시포해수욕장을 따라 늘어서 낮은 지붕의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어촌 풍경과는 거리가 멀다. 구시포해수욕장에서 약 1km 앞에 아스라이 보이는 가막도는 바다 위에 쟁반이 둥실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막도 뒤로 해가 지는 풍경이 일품이고, 해변에서는 백합도 캘 수 있다. 한 시간쯤 캐면 백합과 모시조개를 한 바구니는 너끈하게 캔다. 방파제에서는 구시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데 이 방파제 위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망둑어 낚시를 즐기는 이도 많다.
구시포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면 ‘장호어촌체험마을’에 닿는다. 자동차로 20여 분 걸리는데 갯벌 체험이 가능하다. 고창을 찾은 가족 여행자라면 꼭 한 번 갯벌 체험을 해보길 바란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갯벌 체험이다. 마을에 자리한 체험 안내센터에서 장화를 빌려 신고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갯벌로 향하는 트랙터에 오를 수 있다. 트랙터가 체험장에 도착할 때까지 신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연신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것 마저 재미있는 체험이다. 트랙터 밖으로 펼쳐지는 광활한 갯벌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장호에서 구시포해수욕장까지 갯벌이 4km나 이어져 ‘고창 명사십리’라고도 불린다. 고우면서도 단단한 모래밭 덕분에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찾는 곳이며, 간혹 자동차가 질주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한반도는 고인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으로 우리나라에 3만여 기 이상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한반도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고, 고창에는 1,665기의 고인돌이 있어 단일 구역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있는 지역이다. ‘고창 고인돌 박물관’과 고인돌 주변 탐방 코스가 잘 정비되어 편하게 돌아 볼 수 있다. 또, ‘고창읍성’도 돌아보자.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과 더불어 국내 3대 읍성으로 꼽힌다. 둘레가 1,684m에 달하며, 성곽 바깥길을 걷거나 성곽 위에서 한 바퀴 돌 수 있고, 성곽 안에 있는 소나무 숲길이나 맹종죽밭도 운치 있다.
고창 여행팁
1. 고창의 대표적인 먹거리는 풍천장어구이다. 선운사 주변에 장어구이 전문 식당이 많다. 선운사 앞 인천강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밀려들었다가 빠지면 갯벌이 드러난다. 이 하천을 풍천이라 부르고, 풍천장어는 이곳에서 잡은 장어를 일컫는다. 최근 자연산 장어를 사용하는 식당은 드물어 대부분 고창 여러 지역에서 양식하는 장어를 사용한다. 잡기 전 갯벌에 방목하기 때문에 육질이 쫄깃하고 단단하다. 연기식당(063-561-3815)과 우진갯벌장어(063-564-0101)가 유명하다.
2. 태흥갈비(063-564-2223)는 고창 주민들이 많이 가는 맛집으로 돼지갈비가 유명한 집이다.
[출처 사학연금 사학연금지 9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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