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길을 걸으며 나를 비우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여행
- 2021. 10. 21.
가을, 길을 걸으며 나를 비우다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떠나는 순례 여행. 누군가는 신을 찾아, 누군가는 자신을 찾아 떠나는 이 길은 한편으론 800km만큼의 자유를 뜻한다.
글 | 사진. 정효정 여행작가
비움과 성찰을 향한 여정,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으로 향하는 성지순례길을 뜻한다. 8세기경 한 수도사가 이곳에서 예수의 12제자 중 하나였던 산티아고 성인(야고보, Jacob)의 유해를 발견한 후, 이 외딴 도시는 예루살렘, 바티칸과 함께 가톨릭의 3대 성지순례 장소가 되었다.
중세가 지나며 잊혀졌던 이 길은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며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여행자들이 찾는 비움과 성찰의 길이 되었다. 코로나19 이전의 통계지만 한 해 약 30만 명의 여행자가 산티아고를 향해 이 길을 걸었고, 한국인 여행자도 어느새 9위를 차지할 만큼 그 수가 늘었다.
800km, 머무르지 않는 삶을 살아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루트는 다양하다. 출발 지점에 따라 프랑스 길, 북쪽 길, 은의 길, 포르투갈 길 등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길은 프랑스 국경마을인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걷는 프랑스 길이다.
보통 순례자들은 하루에 20~30km씩 걷는데, 완주에는 30~40일 정도가 걸린다. 약 한 달 이상을 길 위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의 순례자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사실 뚜렷한 거주지 없이 매일 숙소를 옮기며 지내는 여행이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다행히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중세부터 지금까지 순례자들의 편의를 돕는 여러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순례길의 묘미는 단순한 삶이다. 여행을 가면 우리는 여러 사이트를 비교해가며 숙소를 정하고, 관광지와 맛집 체크를 하며 하루의 스케줄을 짜고 동선을 정한다. 하지만 순례길에는 그런 복잡한 계획이 필요 없다. 이 길에는 산티아고 방향을 표시하는 노란 화살표가 있다. 순례자는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복잡하던 머리는 비워지고 단순함이 주는 명쾌함으로 가득찬다. 800km를 걷는 동안, 우리가 길 위에서 얻는 것은 머무르지 않는 삶이 주는 자유로움이다.
순례길을 따라 즐기는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자연
사실 단순히 걷는 것뿐이라면 800km의 순례길은 고난의 행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은 천년을 이어온 순례의 역사와 문화를 만끽할 수 있는 문화체험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산과 평원, 바다 등 다양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트레킹 코스기도 하다.
우선 순례길의 출발지인 생장피드포르에서부터 순례자들은 타임슬립을 한듯 중세의 도시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해발 1,400m의 웅장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과거 한니발의 군대가 이 산을 넘었던 시절을 떠올려 볼 수 있다. 이 산맥을 넘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페인이다.
산티아고 초반에 마주하는 유서 깊은 도시 중 하나가 바로 나바라주에 위치한 팜플로나다. 기원전 1세기, 폼페이우스 장군이 건설한 이 도시는 16세기까지 나바라왕국의 수도였다. 어니스트 훼밍웨이가 이곳에 머물면서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더 걸으면 이라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온다. 그곳의 와이너리에선 순례자들을 위한 와인을 무료로 제공한다. 과거 순례자에게 빵과 와인을 나누어주던 전통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800km를 걸으며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도 순례길의 매력이다. 특히 가을의 산티아고 순례길은 풍요롭다. 초반에 피레네 산맥을 넘은 순례자들은 곧 리오하 지역의 포도밭을 걷게 된다. 이곳은 스페인 최고의 와인이 생산되는 전 세계 5대 와인 생산지 중 하나다. 주렁주렁 매달린 최상품의 포도들이 보기만 해도 탐스럽다. 중반부터는 끝없는 밀밭이 이어진다. 약 200km에 달하는 메세타 평원이다.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활한 지평선이 이어진다. 그리고 갈리시아주에 이르면 산길이 이어지는데, 긴 길을 걷다 보면 500년도 넘은 밤나무에서 밤이 뚝뚝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은 스페인의 땅 끝인 바닷가 마을 피네스테라로 향한다. 그곳에서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긴 순례는 마무리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나를 내려놓는 비움의 여정
순례길은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길이기도 하다. 순례길 초입에서 순례자들은 해발 800m에 위치한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지난다. 이곳에서 순례자들은 용서에 대해 묵상하는 기회를 가진다.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기 전, 순례자들은 해발 1,500m의 레온산을 지난다. 이 산 정상에는 커다란 철로 된 십자가(Cruz de Ferro)가 있다.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에겐 자신의 죄의 무게만큼 돌을 가져와 내려놓고 가는 전통이 내려온다. 지금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고민을 내려놓는 곳이기도 하고 또 소원을 비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주변에는 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람들이 가져온 다양한 물건과 메시지로 가득하다.
여정의 마지막, 순례자들은 마침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한다. 매일 정오에는 무사히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를 축복하기 위한 특별한 미사가 열린다. 성당에 들어선 순례자들이 발걸음을 향하는 곳은 대성당의 중앙 제단이다. 그 지하에는 산티아고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고 중앙 제단 위에는 금빛 산티아고 성인상이 있다. 순례자들은 이 산티아고 성인상을 뒤에서 살짝 껴안고 입맞춤을 하며 길고 길었던 여정의 마무리를 알린다.
이 길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순례길의 초입에선 누구나 800km의 여정에 막막해지곤 한다. 그러나 산티아고 대성당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선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한 걸음씩 꾸준히 걷는 것. 그 길 위에선 어느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며 걷다 보면 어느새 그 막막하기만 하던 순례길 완주가 현실이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산티아고 여행 팁
인사말 : “Buen Camino(부엔 카미노)!”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가장 많이 하는 인사말이다. 길을 걷다 마주치는 순례자에게 눈을 살짝 마주치며 인사를 해보자. 그다음 자주 쓰이는 말로는 ‘안녕’을 뜻하는 ‘Hola(올라)’, ‘감사합니다’를 뜻하는 ‘Gracias(그라시아스)’가 있다.
순례자 여권 : ‘크레덴시알(Credencial)’은 순례자 사무소에서 발급해주는 순례자 여권이다. 이 증명서에 각 구간별로 도장을 받을 수 있으며, 이 도장을 토대로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크레덴시알이 있어야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 묵을 수 있으며, 순례자를 위한 각종 할인을 받을 수 있으니 늘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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