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샘물이 흐르는 공간 _ 조치원 문화정원
- 여행
- 2020. 11. 30.
더러운 물을 정화했던 정수장이 시민들을 위한 문화정원으로 변신했다. 긴 배수로를 따라 조성된 정원은 계절마다 운치 있는 풍경이 되어 사람들을 맞이하고, 85년의 세월을 간직한 오래된 정수 공간에서는 예술작품이 전시된다. 따뜻한 가을 햇살이 닿아 아름다움이 깊어지는 이곳, 조치원 문화정원의 시간을 따라 걸었다.
글.이성주 사진.이정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는 정원
녹이 슬고 빛바랜 낡은 조치원 정수장은 일제 침탈의 잔재로 남은 장소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 수탈의 내륙기지로 활용한 조치원에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해 지어진 정수장 시설이다. 1935년에 설립된 조치원 정수장은 빨간 벽돌과 나란히 뚫려있는 긴 창, 지붕 외관만 보아도 오래된 건물인 걸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졌으며 ‘감미로운 샘물이 흐르며 푸른 하늘을 품고 있다’는 뜻의 ‘감천류여람(甘泉流如藍)’이라는 표지석을 갖고 있다. 문화공원에 들어서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거대한 하늘색 두 수조는 더러운 원수를 응집해 침전시키고 여과하는 시설이다. 침전기는 무려 3,000톤 용량, 급속 여과기는 5,000톤 용량의 물을 정수한다. 정수장은 78년 동안 조치원을 비롯해 주변 지역으로 깨끗한 물을 보냈고, 2013년 4월까지 정수 시설로 사용됐다.
‘조치원 문화정원’ 조성은 지난 2016년 정수장 시설이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면서 추진됐다. 2018년 2월, 세종문화정원 조치원 정수장 설계공모를 시작으로 약 1년 반이 지난 2019년 7월 조치원 문화정원이 완공되었다. 이곳은 지역 청년들이 문화예술활동을 펼칠 수 있는 거점이자 지역 주민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생태 수로와 녹색정원, 놀이정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정수장이 폐쇄되고,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던 조치원의 평리 근린공원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2019년 7월 27일, 준공식을 마친 후 비로소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문화가 정화되는 재생의 공간
조치원 문화정원은 전시동, 관람동, 체험공간으로 리모델링했고, 교육실, 관리실, 휴게실 등이 배치되는 건물 1동을 신축하며 부족한 공간을 확보하고 편의와 활용도를 높였다. 1935년에 건립된 붉은 벽돌의 정수장은 1970~80년대 증축된 부분으로 덧씌워진 모습 그대로 쓰이며 ‘기억공간 터’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정원 가운데에 위치한 이 건물의 실내에는 동서남북 지역으로 정화수를 보내는 길이 있다. 크고 작은 파이프를 따라 흐른 물길을 짐작할 수 있고, 이 샘물이 지역인들의 생명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옆으로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내려갈 수 있는 ‘전시공간 샘’은 기존 지하 저수조를 활용해 전시공간으로 거듭났다. 오랜 세월 물을 가둬두던 콘트리트 저수조의 물때 흔적이 지난 시간을 보여주며, 콘크리트 벽에 뚫린 둥근 파이프 자국은 공간을 현대미술의 작품처럼 특별하게 돋보이게 한다. 물이 가득차던 공간은 버려진 빈 공간으로 남지 않고 다양한 예술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으로 쓰인다. 조치원 문화정원을 조성하며 유일하게 구축한 신축 건물인 ‘커뮤니티 뜰’은 공원 전면에 배치되어 옛 공간과 새로운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은 여름날 더위를 식히고 갈 수 있는 카페 공간이자 지역 청년들을 위한 강의 및 학습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뒤로 조치원 문화공간의 상징처럼 자리하고 있는 하늘색 정수 시설은 나란히 왼쪽은 침전기, 오른쪽은 여과기로 쓰이던 시설이다. 위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관리자의 안내에 따라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어느덧 조치원 문화공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높이 만큼 독특한 구조의 시설이 기묘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킨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높은 시설을 끝까지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기분마저 든다.
가을 하늘이 담기는 물길
조치원 문화정원을 설계한 이엠에이건축사사무소는 이곳을 ‘문화의 단(壇)’을 주제로 설계했다. “정수장과 소공원의 역사적 가치와 기억이 공존하는 기존 시설물들에 새로운 ‘단’이 더해져 조치원 문화정원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새로운 조합으로 만난다는 개념”으로 구축했다고 한다. 조치원 문화정원의 ‘단’은 터를 잡고 인공물을 세우기 위해 바탕이 되는 구축을 뜻한다. 따라서 이곳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새롭게 만나는 곳이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공간이다.
오래된 정수장은 공간의 재생을 위해 장소의 회복, 문화가 흐르는 물길을 통한 경관의 복원, 커뮤니티 중심 공간이 되고자 했다. 이곳의 역사적 가치는 오랜 시간이지나 다시 시민들을 위한 ‘도시정원’으로 재탄생하면서 비로소 의미 있는 장소가 되었다. 또한 조치원 문화공원은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문체부와 (사)한국건축가협회가 공동으로 주관한 <대한민국 공간문화대상>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건축미를 인정받았다.
도시의 물이 모이고 여과되고 정수되어 배수되는 인내의 과정처럼, 문화가 모이고 새롭게 정화되어 다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이제 이곳에서는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야외정원에 있는 물거울에 오래된 건물과 계절의 풍경이 오롯이 담긴다. 시민들이 오가는 걸음 따라 잠시 쉬어갈 수 있고, 샘물이 흘러가는 물길 따라 하늘이 쉬어가는 곳, 조치원 문화정원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 우리의 소란스러운 마음을 잠시 달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조치원 문화정원 샘
세종시 조치원읍 수원지길 7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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